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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Mar 14. 2023

앙(仰) 이목구심서 4

봄이 오는 곳

  봄이 가장 먼저 오는 곳은 어디일까요. 내가 생각하기엔 산이나 마을, 바다보다는 들입니다. 아직 산자락에는 희끗희끗 눈이 진을 치고 있지만 들에서는 다릅니다.

  강 건너 밭에서 한 농부가 거름을 뿌리고 있습니다.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농부에게는 이미 봄이 시작된 것이지요. 꽁꽁 얼었던 땅이 녹아들자 농부는 지치고 허기진 땅에 서둘러 음식을 대접합니다. 추위에 시달렸던 몸을 추스르기엔 영양 있는 음식이 최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땅이 잠에서 깨어나 심호흡을 하며 물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경직되었던 땅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진동을 느낍니다. 농부는 땅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한 청각과 섬세하고 따뜻한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봄의 소리를 알아듣고 잔설이 남아있는 강변의 들에 나선 것입니다.


  집에서 봄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안방이나 거실이 있는 실내가 아닙니다. 역시 마당 한쪽에 딸린 텃밭입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무심코 텃밭을 둘러보았습니다. 밭이 촉촉이 젖어있습니다. 밭의 이마에 혈색이 돌아 생기가 있습니다. 겨우내 어둠 속에서 응집되던 생명력이 임계점에 다다랐습니다. 단단히 잠겨있던 몸을 열어젖히고 싶은 땅의 간절한 의지와 분출의 욕구로 밭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긴장감에 잠겨 있습니다. 한의사의 침처럼 단 한 번의 자극만으로도 봄은 분수처럼 뿜어 나오겠지요.

  텃밭의 시금치가 흔들립니다. 뿌리에 전해져 오는 봄기운이, 이파리에 감도는 봄물이 그를 간지럽히고 있네요. 그리고 그 진동은 텃밭에 발을 들인 나를 흔듭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선 봄동이 나를 봄의 물가로 손짓하고 있습니다. 그 초대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얼굴을 붉힙니다. 내게도 봄 같은 희망이 있는가, 내게도 비축해 놓은 그 무언가가 있던가, 내게도 봄이 오는가라는 물음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봄은 준비하는 자의 몫입니다. 모두가 웅크린 겨울에도 깨어 드러나지 않게 자신을 갈고닦은 수고의 결과입니다. 저절로 주어지는 봄은 진정한 봄이 아니겠지요. 계절이 여름이 되더라도 나의 봄은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 봄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자책하지만, 여름에라도 가을에라도 나만의 봄을 맞이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좀 늦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한다면 결과적으로 성공한 여행입니다. 평상시 걸음걸이가 느린 내게 늦은 봄은 당연지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과 깊이의 문제입니다. 걸어가는 과정이 좋았다면 맞이하게 될 봄도, 이후에 다가올 가을에도 합당한 열매를 수확하겠지요. 봄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발에 묻은 흙을 털고 마루에 올라섭니다. 그런데 어느새 방에 들어와 앞치마를 걸친 봄이 미소 짓고 있네요.

                                                                                           2023년 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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