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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Aug 29. 2023

환아정(換鵝亭)에 서다

앙(仰) 이목구심서Ⅱ-12

환아정(換鵝亭)에 서다


환아정에 왔다.

산청읍내를 휘도는 경호강변, 아찔한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누각은 웅장하고 산뜻하다.

크고 작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읍내는 분지이자 전형적인 농촌의 소도시다.

이 분지에서 제일 높다란 언덕 위에 터를 잡아 읍내 어디에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


한때 산청의 환아정은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의 3대 누정으로 불렸다고 한다.

처음엔 1395년에 건립되었고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 재건, 또다시 1950년에 화재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2022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기존에 있던 자리는 현재 산청초등학교가 있어 조금 위쪽인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환아정(換鵝亭)이란 이름은 중국의 경호강에서 한 선비가 왕희지에게 거위 한 마리를 주고 정자의 이름을 부탁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양쪽으로 두 마리의 해태상이 큰 눈을 치켜뜨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구를 지키고 있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입구에서 올라오면 보이는 환아정

계단을 올라서자 말아둔 두루마리를 펼친 듯 널따란 마당이 한 번에 드러난다.

희고 작은 자갈들이 일제히 오전의 싱그러운 햇살로 샤워를 하고 있다.

발아래에서 싸그락싸그락 재잘거리는 흰 자갈들의 환호를 들으며 정자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다.

기와를 얹은 타원형의 담을 따라가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작년, 근처의 꽃봉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읍내는 비현실적으로 작게 보였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을 내밀면 뾰족한 전봇대에 찔릴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조용히 흐르는 경호강도, 붓을 닮은 필봉도, 학교 건물도 눈앞에 있어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싶다.


몇 개의 나무계단을 올라 우뚝 솟은 누각에 올라선다.

신발을 벗으라는 푯말이 있지만 슬리퍼가 여러 켤레 준비가 되어있어 신고 올라선다.

"와아~"

외마디 비명이다.

탁 트인 널따란 마루가 보이고 붉은 기둥과 화려한 단청이 눈에 들어온다.

지은 지 몇 해 안된 건물에서 내뿜는 나무향과 물감 냄새가 강바람을 타고 몸에 스며든다.

요 며칠 잦은 소나기로 청아해진 하늘 아래, 본래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정자다.

기둥의 붉은색과 단청의 연초록과 분홍색이 선명하게 제각각의 자리에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여기에 지붕의 검은 기와는 비취색 하늘이 내려와 검푸르게 반짝인다.

총천연색의 색깔이 저마다 선명하다

아래는 대리석 돌기둥들이 누각 전체를 떠 받들고 있다.

마루의 가로와 세로 길이를 걸음으로 재본다.

어림잡아 200평 정도 될까.

마루에 아름드리 나무기둥 35개가 촘촘하게 지붕을 떠 받들고 있다.

기둥은 그래서 믿음직스럽다.

천장의 대들보에는 연의 색들이 칠해져 있고, 몇 점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정자에 올라서바로 정면에는 경호강이 누워있다.

잔잔한 강물 속에 나무와 산과 건물의 그림자가 들어와

몸을 담그며 더위를 씻는 중이다.

정자의 붉은 기둥과 기둥 사이로 산이 들어와 공간을 채운다.

또 다른 기둥 사이엔 강이 들어와 흐른다.

웅석봉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기둥 사이에서 액자가 되어 걸려있다.

기둥은 가장 완벽한 풍경화를 내걸고 있다.

원근과 명암이 실사이며, 숨 쉬며 살아 꿈틀거리는, 날 것 그대로의 풍광이다.

여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경치에 나는 경탄한다.

이래서 많은 옛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구나.

나 또한 그들의 눈을 채우고 마음을 데우던 산과 강을 보고 있다.

지금의 나와 역사 속의 시인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먼 후대에서도 누군가가 이 자리에 서서 지금의 감동을 그대로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기둥 사이에 걸린 풍경화들

기둥 칸칸마다 모습을 바꾸는 풍경화는 선경에 가깝다.

파노라마처럼 360도로 펼쳐지는 장면마다 각기 다른 모습과 소리와 이야기가 있다.


정자의 그늘 안으로 멀리 지리산을 건너온 바람이 들어와 쉬었다 간다.

언덕 아래 읍내에서 올라오느라 몸이 더워진 온갖 소리도 마루에 머문다.

환아정은 사람과 자연과 시간이 함께 머무는 곳이다.

여기서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기에 쉽게 벗이라 부를 수 있다.

누구라도 동반자라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이젠 내가 저기 기둥 안에 들어가 하나의 풍경이 되어야 할 시간이다.

깨알처럼 아주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재이지만 덤불 속의 작은 달개비꽃이라도 되고 싶다.

나는 오늘 어떤 풍경이 될는지---.

천장의 대들보엔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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