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봄에게

앙(仰) 이목구심서Ⅱ-17

by 강경재

가을이 봄에게


안녕?

난 가을이야.

정확히 말해서 10월 6일, 사금파리 같은 가을 아침이지.

역사 이후 처음 건네는 인사라 좀 어색하고 쑥스럽기도 해.

우리 서로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얼굴 맞대고 만난 적이 없지.

남극과 북극처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운명적이야.

하지만 다른 얼굴과 표정을 짓고 있다 해도 널 보게 된다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우린 같은 피가 흐르는 한 몸이기 때문이지.


산머리에 고개를 내미는 햇님의 미소가 참 따사로워.

가끔 코끝 싸하게 강바람이 불어와 나른한 몸이 으스스 떨리기도 해.

너는 아니?

이 계절엔 눈이 부셔 아프다는 것을.

산과 하늘은 깨끗하고 또렷하여 나뭇잎 하나하나가 망막 안에 들어와 흔들릴 때마다 눈이 까끌까끌해져.

금세 눈에선 이슬이 맺히게 돼.


봄, 너는 직접 볼 수 없어 안타까울 거야.

울긋불긋 치장한 감나무 이파리가 마당에 누워있어.

단단하고 고집스럽던 땡감도 노랗게 얼굴을 펴 미소 짓고 있지.

진초록의 잎사귀 사이로 시뻘건 홍시도 두어 개 보여.

내게 카메라가 있다면 모든 장면을 찍어 가지마다 걸어두었을 거야.

엄동설한을 헤치고 눈을 뜬 봄, 네가 이 사진을 보면서 더 큰 위로와 힘을 받았으면 좋겠어.

하늘을 들어 올리느라 애쓰는 너의 여린 손가락 하나하나를 어루만져주고 싶어.

바닥에 내려온 감잎

나는 만물이 잘 익어가도록 거들며 부추기고 있어.

모두가 내 품 안에서 살을 찌우고, 성숙해 가지.

이렇게 충만한 계절에 문득 봄, 네가 생각났지 뭐야.

우린 상사화를 닮았어.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마주할 수 없었지.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아.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네 모습이 느껴져.

언 땅을 부수는 너의 힘센 부드러움이 손끝에 보여.

바위와도 같은 중력을 극복해 낸 연둣빛 새싹의 의지도 내 심장에 고여있어.

가을인 내가 열매이고 꽃이라면 너는 줄기이고 뿌리야.

넌 모든 계절의 어머니야.

생명이 태어났으니 너는 나의 고향이야.


겨우내 깜깜한 지하에서 몇 번이고 주먹을 움켜쥐며 다짐했을 너의 반란과 혁명을 기억할게.

너의 꿈을 키우고 어루만져 동글동글하고 빨갛게 말아둘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재료를 사용해 계절을 풍요롭게 꾸며볼 거야.

결국 너의 헤게모니(지배)는 내게서 완성될 거야.


이제야 알게 되었어.

봄, 네가 곧 나라는 것을.

내 몸이 곧 봄이라는 것을.

그러니 가을이 궁금해 보고 싶어 지거든 너 자신을 바라봐.

스스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 곧 가을인 나를 사랑하는 거야.

경이로운 가을을 눈이 모자라도록 바라보는 일이 봄을 아는 방법이야.

갈빛 상수리처럼 잘 익어가는 비결이야.


어느새 서쪽 하늘가엔 고개 숙인 벼가 비스듬히 드러누워 등불을 켜 놓았어.

뺨에 와닿는 밤의 옷자락이 서걱거려.

너의 안녕을 기원하며 건투를 빌어.

그럼, 오늘은 여기서 줄일게.

익어가는 산딸나무 열매들


추신) 보름달처럼 커다란 나뭇잎을 닮았을까?

목련 꽃잎 위에 수놓은 너의 답장을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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