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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Oct 16. 2023

걸어 다니는 감나무

앙(仰) 이목구심서Ⅱ-18

걸어 다니는 감나무

마당에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는 사시사철 한 자리에서 계절이 풀어놓는 풍경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천직이다. 한가위를 지나면서 한두 개의 홍시를 매달더니, 시월 중순인 지금은 산골분교 운동장에서 막힘없이 피어나는 아이들의 웃음꽃 마냥, 나무 곳곳이  반짝반짝 거린다. 요즘 들어 감나무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달뜬 몸에선 충만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즐거운 기분은 겉옷마저 화려하게 차려입도록 부추긴다.

나무에게 감은 아들이며 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자녀이다. 그런 감들이 드디어 출가를 할 만큼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자녀들을 바라보는 감나무는 삶의 희열에 행복하다. 손톱만 했던 아이들이 비바람을 맞으며 어른 주먹만큼이나 몸집을 키웠고, 빨갛게 내면을 채워 성숙에 이르렀다. 나무는 흐뭇한 충만감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소리만 내지 않았지 그 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싱글벙글한다.


살랑대는 바람이 때마침 찾아와 온몸을 흔든다. 감은 깊어진 가을하늘에 달궈진 몸을 담근다. 그는 이미 세상이 두렵지 않다. 낮엔 태양이, 밤엔 달과 별들이, 바람이 종종 가르쳐주는 삶의 이치를 이미 몸에 새겨 두었다. 그의 지혜는 내면에 가득 차올라 부모를 떠나 세상에 나서길 재촉한다. "쿵"하고 한 존재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가 땅에 울린다. 땅에 고하는 전입신고다. 이제 새로운 삶의 무대가 펼쳐진 것이다. 나무는 품을 떠나는 자녀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충혈되고 뜨거워진다. 어찌 기쁘고도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나무는 자녀에게 화려한 나뭇잎 금침(衾枕)을 덮어준다. 자주 외롭지 않도록 따뜻하게 살아가라고 한 겹, 두 겹, 세 겹---자꾸만 덮어준다. 독립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자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이제 아낌없이 내어주어 감나무는 헐벗고 야위어 가고 있다. 그러나 한 꺼풀씩 드러내는 나신(裸身)은 불쾌하지 않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요즘 들어 아침이면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한 방울의 물로 낯을 씻고 날아오는 물까치 가족이다. 이들의 이른 방문은 온 동네가 알만큼 요란하다. 그러나 감나무에게 이들은 소중한 이웃들이다. 아침식사를 맛나게 먹은 물까치 가족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씨앗을 옮겨주기 때문이다. 발 없는 감에게는 다른 환경의 땅으로 이사할 수 있어 두근두근 설레는 특별한 기회가 된다. 감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까지 날아가는 것이고, 까치는 싼값에 고용한 이삿짐센터의 직원이 되는 셈이다.

감나무에게 사람은 양가감정을 갖게 하는 그런 존재이다. 까치만큼은 아니지만 가끔씩 찾아와 말을 걸어준다. 비록 감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그 덕에 자녀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곳곳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욕심에 눈먼 사람은 황금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가르듯 나무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존재자체를 위협한다. 그러나 감나무는 이를 되갚거나 기억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나무는 오로지 아들딸이 어디에서든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무는 도움 준 이들에게 직접 찾아갈 수 없으므로 최상의 맛으로 보답을 하고자 불철주야 자신을 단련한다. 몇몇에게서 받은 도움이지만 그의 보답은 가장 민주적이고 보편적이다. 미운 이, 고운 이 가리지 않고 열매를 나눌 줄 안다.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최고의 맛을 제공한다. 감나무는 역시나 큰 거인이요, 훌륭한 가장이다. 부여받은 역할에 충실하여 미더운 존재이다. 나에게 감나무는 감탄사이다.

부모의 마음이리라. 감나무는 인간만큼이나, 오히려 몇몇 자격 없는 어른보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지 부모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되어 감나무가 안쓰럽기도 하고 거인처럼 위대해 보인다. 그래서 홍시처럼 곧 떨어질 아들이 속을 헤집는 어느 날엔 나무의 발치에 앉아, 조용히 훈수를 청하여 보는 것이다. 한 그루 걸어 다니는 감나무가 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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