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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Oct 04. 2023

흐르다

앙(仰) 이목구심서Ⅱ-16

흐르다


  이러구러 가을이 왔어. 먼 길을 달려온 강물은 어둑발 속으로 흘러들고, 계절은 발치에서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어. 흘러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꼭 목적지를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야. 강이 밤을 안고 가니 아침이 딸려 나오고, 다시 낮을 업고서 밤을 호출하는 거야. 그래, 이 밤은 지난밤과는 다른 몸이야. 어제의 몸에서 나던 향기와는 다른 구릿빛 살 냄새가 묻어 나. 밤이 흐르기에 그 까만 물결 위에 올라탄 세상도 덩달아 출렁거려. 이미 파도치는 밤의 정수리에 내 몸은 떠 있어. 나를 건져 올릴 나루터는 저 멀리에 두고 와서 파도를 거슬러 부모님 누운 고향에 돌아갈 수 없어. 예로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가 닿을 수 없었어. 그래서 아예 맘 놓고 밤의 항로에 순응하는 거야.


  주위를 둘러봐. 알알이 열매를 흔들고 있는 나이 많은 팽나무를 봐. 연둣빛 잎사귀가 어느새 붉게 익어가는 중이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더 확실해지지. 별들이 동그란 바다에 떠 있어. 보폭을 맞추어가며 일렁이기에 서로 부딪치지 않아. 거대한 순례자의 물결처럼 신비로운 우주 건너편으로 향하고 있어.


  우리 몸도 들여다보면 물길이 촘촘하게 짜여 있어. 움직이는 세포 안에서 원자가 돌고, 핏줄을 따라 호르몬과 영양소가 돌고 있지. 나의 눈동자도, 무의식도, 양심도 한순간조차 쉼 없이 흐르는 중이야. 우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떠나가는 여행자이지. 미지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거침없는 탐험가야. 우리는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원하든 원치 않든 유목민으로 살아가지.


  아래를 봐. 땅이, 바닥이 나아가고 있어. 머뭇거리는 계절을 불러와 온갖 곡식을 기르고 생명을 살리고 있지. 세상이 흐르는데 어찌 서 있을 수 있겠어. 하루도 쉬지 않고 지나는 강물처럼 살아 봐. 고이지 않아 은어들을 키우는 강처럼 우리도 파도쳐야 살아갈 수 있어. 살아가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 거야. 다름과 무지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자세야. 나의 불완전을 고백하는 거지. 삶은 순간들의 연속이기에 우린 변화를 꾀하고 성장할 수 있는 거야.


  강을 막아서는 유일한 장애는 죽음이라고 말들 하지. 나무와 고양이의 죽음, 별과 부모의 죽음으로 강물이 멈춰버렸다고 해. 바닥을 드러내고 말라버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아. 그러나 아니야. 죽음도 흐름의 연속일 뿐이지. 물결의 유구한 율동 중에 옷을 갈아입어 때깔이 바뀐 것일 뿐이야. 죽음이 강물을 막아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드는 거야. 마치 물이 그릇에 따라 몸을 바꾸는 것처럼 약속된 시간의 모습으로 변모한 거야. 이 우주가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그날까지, 몸을 바꿔가면서 흐름을 멈추지 않을 거야.

  흐름은 어느 날 뚝딱하고 생성된 마법이 아니지. 이는 태초의 빅뱅에서부터 시작된 거야. 원시 어둠에서 탄생한 빛 하나가 지금 여기 숨 쉬는 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고, 물방울 하나가 끊이지 않고 나에게 도착한 거야. 점이었던 나는 처음부터 선을 그은 거야. 그러나 그 실체를 본 사람은 누구도 없어. 만져지지 않아서 자주 잊고 살아. 자신이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지. 그저 '오늘 하루만, 오직 나만'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생각해. 이는 하루 만에 말라버리는 물웅덩이와 같아. 서서히 끓어오르는 두부 으로 숨어 들어간 미꾸라지 신세라 할 수 있지. 이젠 인정하고 기억해야 해. 맞서지 말고 그 물결 위에 올라타야지.


  많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동적으로 동참하고 있어. 스스로 일어나 몸을 둥글게 말고 굴러 봐. 우리의 몸짓은 영원으로 이어지니까. 이미 영원한 선상에 놓여 있으므로, 난 무한 가운데 한 점, 한 부분이지. 영원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요, 줄기와 줄기를 이어주는 줄기이고, 물과 물을 이어주는 물인 거야. 영원과 영원을 채우는, 나는 작지만 큰 틈인 거지. 미물에 불과하지만 신과도 같은 존재인 거야.


  지금 흐르는 모든 존재들, 너와 나는 동시대를 통과하고 있어. 물방울들 모여 거대한 물결이 되어 어둠을 가르며 전진하고 있어. 너의 물방울이 아니면 나의 그것도 불완전해지고 의미를 잃어버려. 세상이 자꾸 삐걱대는 이유야. 그래서 나의 흐름만큼 너의 흐름도 소중하지. 네가 풀이든, 강아지든, 바람이든 함께 어울려 떼굴떼굴 굴러가야 해. 우리는 모두 동무요, 동지야. 귀하고 천한 건 없어. 우린 하나의 강물에 물방울로 뒤섞여 떼어낼 수 없는 몸이며, 같은 목적지를 지향하고 있어. 우리는 함께 선물 같은 아침을 맞이하였고, 하나의 심장으로 호흡하는 몸의 여러 지체들이야.


  흐름은 방향을 가지고 있어. 무작정 출렁이기만 해서는 안 될 거야. 스스로 만족하면서도 공동의 선이라는 항구에 정박해야 하지. 그래야 나중에 탈이 없고 영원과도 맞닿을 수 있어. 흐름의 낙오자나 불청객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때때로 나는 반대 방향으로 거스르고 싶어지기도 해. 어쩌면 역사는 반역과 일탈의 몸짓이라는 생각을 해봐. 거꾸로 흐름도 흐르는 것이니까. 일상을, 상식을 뛰어넘는 곳에 성장과 발견이 있어 왔지. 그러나 역류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어야 해. 줄곧 거꾸로만 가는 것은 곤란하지. 대세라는 말이 있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물결, 유행이라는 의미이지. 크거나 많다고 해서 그 파랑(波浪)이 정도(正道)라고는 할 수 없어. 홍수가 마을을 덮치는 것은 잘못된 흐름이야. 다수의 선택을 받은 독재자가 인류를 위협하곤 했어. 작지만 맑고, 끊임없이 흐르는 샘물이 온마을을 살려. 일상의 사소한 선의(善意)들이 사람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지. 여하튼, 우리 함께 헤엄쳐가기로 해. 햇볕 비추이는 이성과 양심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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