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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Sep 25. 2023

추남(秋男)의 방황은 무죄

앙(仰) 이목구심서Ⅱ-15

추남(秋男)의 방황은 무죄


일이 있어 진주에 왔다가 무작정 시내를 벗어났습니다.

목적 없이  머리가 아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아무 데나 갑니다.

그나마 목표라면 코스모스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네비에 입력해 찾아보지만 숙박이나 음식점뿐입니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코스모스를 보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볼 수 없다 해도 도시를 벗어나면 그만입니다.

차는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합니다.

운전대는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바퀴는 느릿느릿 태업을 합니다.

이렇게 도착한 곳인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월아산을 지나왔으니 근처 동네겠지요.

논가에 정자가 하나 보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이 빈 정자만이 홀로 앉아 놀고 있습니다.

그 주위로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 있습니다.

연두에서 점차 구릿빛으로 몸을 바꿉니다.

차에서 내려 가을 햇볕에 몸을 살찌우고 있는 나락을 봅니다.

이처럼 가까이에서 본 지도 참 오래되었다 생각합니다.

배 부르다~

하나의 씨앗이 몸을 불려 수백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신비이자 기적 같은 일입니다.

물이 자박자박한 논에서는 벼 익는 소리가 납니다.

"쌰르르 쌰라락"

고랑 사이로 물먹은 바람이 불어와 벼의 고개가 흔들거릴 때마다 희미하게 밥냄새가 묻어납니다.

촉촉하게 윤기 흐르는 쌀밥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따끈한 밥이 눈에 선합니다.

저마다 고개를 흔들고 있는 벼의 몸짓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들에 흐르고 있습니다.

논밭이 주는 곡식에 마을은 곧 춤과 노래로 화답할 것입니다.


마을을 지나 둑에 올라서니 널따란 저수지가 보입니다.

이 둑길을 따라가다 물가로 이어진 산책로를 걷습니다.

왼쪽으로 불과 1미터 옆에서 물이 출렁거립니다.

이는 음악의 리듬처럼 규칙적이다가도 간간이 건네는 말처럼 부드럽게 속삭입니다.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눈길을 두다가 아찔해집니다.

물 위를 걷는 느낌이 듭니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요정의 노래가 윤슬이 되어 물 위에서 반짝반짝 꽃핍니다.

그 화려함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길섶에서 금빛 마타리가 나를 반깁니다.

가을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 중에 하나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여러 장의 사진을 눈에 담고 가슴에도 담아봅니다.

산도, 호수도 녹색으로 뒤덮여 있는 가운데 마타리의 존재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나무그늘 아래에서 본 풍경

한동안 걷다 보니 물가의 서어나무 그늘아래 나무의자가 있습니다.

등받이 없이 나무판을 가로질러 놓은 것입니다.

앉아보니 절경이 따로 없군요.

끊임없이 출렁이며 잔물결이 밀려드는 담녹색의 저수지와 흰구름 몇 조각을 한 켠에 걸어놓은 쪽빛하늘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거기다가 나뭇가지가 둥근 터널형으로 시야를 꾸며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타원형의 화면으로 물과 산과 가을의 창공을 봅니다.

잊을만하면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저수지의 잔주름은 더욱 늘어나 내 발목께로 달려듭니다.

그 일렁임을 보노라면 초대형 유람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착각을 하게 되어 어지럽습니다.

조종간을 잡은 선장이 되어 마을을 향해, 산을 향해 바람을 헤치고 나아갑니다.

"내일이라는 신대륙을 향해 오늘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중이지요."

저수지는 발치에 다가와 말하고 있습니다.


노랑나비 하나가 곁에 날아와 허공을 바느질하더니 곧 떠나갑니다.

눅눅해진 가을도 따라 일어납니다.

마타리가 피어야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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