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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Apr 14. 2023

앙(仰) 이목구심서 17

도서관은 ○○이다

주말 오후에 진주 서부도서관을 찾아왔습니다.

주차장에서 도서관으로 들어가려면 육십여 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도서관은 산의 중턱에 비교적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어 계단이 많고 가파르게 이어집니다.

이는 지식을 구하는 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미리 무릎의 통증으로 체득하게 하려는 섬세한 의도 같습니다. 쉼 없이 한 번에 계단을 다 오르기는 어렵습니다.

오르다가 꼭 한 번 이상은 다리 쉼이 필요하고, 특히나 요즘 같은 계절에는 땀이 이마에 동글동글 맺혀 흘러내릴 정도입니다.

뻐근한 다리를 이끌고 마침내 들어선 도서관은 백화점에 온 듯하여 수만 권의 책이 큰 눈을 끔벅이며, 마치 연병장의 군인들처럼 도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줄곧 부동자세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실내에는 빽빽한 긴장감이 무겁게 가라앉아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나는 책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있음을 느끼지만, 곧장 한 곳에 눈을 두고 그곳으로 성큼 다가갑니다.

앞에 있는 책들에 하나하나 눈맞춤을 해봅니다.

때론 구면인 얼굴도 있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처음 만난 이라도 호감이 가면 악수를 하며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그러다 이거다 싶은 책을 찾게 되면 그를 선택하여 품에 안습니다.

곧 그를 책상에 눕혀 편히 쉬게 해 줄 것입니다.

느릿느릿 그의 속마음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줄 겁니다.

 사실 도서관에서 책은 평생을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모든 책의 운명이요 업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선택으로 책은 기나긴 기다림과 일상이 된 직립에서 벗어나는 보상을 받습니다.

책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은 주목받기 위해 화려하거나 튀는 옷을 입기도 하고, 흥미롭고 파격적인 말솜씨로 우리를 부릅니다.

또 어떤 이는 정복 차림의 선비처럼 침묵하여 오히려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곤 합니다.

이와 달리 선택에서 제외된 책들은 자신을 지목해 달라고 따가운 눈총을 보내며 온몸으로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근처를 서성이다 미안한 마음에 여러 번 책을 어루만지며 들고 놓음을 반복합니다.

마음 같아선 다 집어 들어 하나하나 눕혀주고 페이지마다 눈길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선택에는 그림자처럼 포기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책에 '다음번에는 너희들을 선택해서 쉬게 해 줄게' 하는 말을 남겨두고 돌아서야 합니다.

지금도 불 꺼져 어두운 공간 속에서 두 눈 말똥말똥하니, 밝아오는 새날을 초병처럼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책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때때로 나는 도서관이라는 광대한 숲을 거닐며 바위의 나이테를 읽고, 미래를 그려보며, 대양을 헤엄치고 처녀의 심해에 침잠하여, 어둠에 묻혀있는 진실들을 한 움큼씩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더구나 도서관은 그 품을 가늠할 수 없어 내 전 생애를 투자해도 완주할 수 없는 우주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콤하고 흥미로운 꿀물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미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세워져 인류의 지적인 갈증을 해결해 주었다는 사실은 도서관의 의미와 효용성을 더욱 확고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지속되는 한, 아니면 인류를 대신할 다른 생명체가 등장한다고 해도 도서관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도서관은 각각의 개인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합니다.

그도 우리처럼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릴 줄도 압니다.

수많은 사람과 사귀고 사랑을 합니다.

만나고 헤어지며, 병들고 나이 들어 죽어갑니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해 다수를 만나고 삼라만상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도서관의 태생적 본능이자 사명입니다.

도서관 또한 사람들을 만나 지식을 넓히고 이해의 폭을 넓혀갑니다.

사람과 도서관이 유기적으로 주고받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위아래가 따로 있지 않고 서로 동등합니다.

그래서 서로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고 끝까지 공존하는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나오면 우측에 남가람체육공원 테니스장이 커다란 몸집을 뽐내며 서 있습니다.

매번 도서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경쾌하고 건강한 함성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옵니다.

저들은 육체의 몸을 키우고자 땀 흘려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그래요, 나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있습니다.

비록 피땀을 흘리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시간과 만남의 즐거움을 포기하고서, 대신 책을 붙잡고 씨름 아닌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운동하는 이들의 열정만큼 나 또한 매일매일 문자를 그러모아 뿌리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매불망 날 기다리고 있을 책의 눈망울을 떠올립니다.

자주 계단을 오르내리며 책에 자유와 쉼을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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