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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Sep 21. 2023

그 어떤 모순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축구를 본다

시골 여자 축구_8

© 우리



내가 처음 열정을 다해 축구를 보게 된 것은 2002 월드컵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집에서, 식당에서, 거리에서, 심지어 학교와 모든 관공서에서도 축구를 봤다. 아마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북통일보다도 우리나라 대표팀의 승리를 염원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나 역시 학교, 집, 공설운동장 등 장소 불문, 사람 불문 열과 성을 다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의 서사에 감동하기도 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보는 경험이 재밌고 신기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간혹 TV로 같이 축구 경기를 보곤 했다. 크면서 쌓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2002 월드컵 이후 다시 돌아온 한국 축구의 실력 때문이었는지 볼 때마다 신경질을 내서 자주 쫓겨났지만, 그래도 축구를 보는 일은 나에게 항상 즐거운 일이었다. 아버지 옆에서 처음 프리미어리그를 봤던 것도 기억난다. 볼 때마다 신경질 나게 했던 국대(그 당시) 축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 특히 2배속을 한 것 같은 공수 전환 속도는 충격적이기 까지 했다. ‘저런 경기를 하고도 선수들이 죽지 않을 수 있구나.’ 딱 그런 마음이었다.


어쨌거나 2002 월드컵도, 충격적이었던 프리미어리그도 순간의 유흥이었을 뿐. 내가 진짜 축구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몇 년 전 팬데믹이 시작되고부터였다. 아이들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심신 안정을 위해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던 어느 날 이었다. 우연히 손흥민 선수의 골 모음 영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하이라이트 안에는 한 경기에 4골을 넣은 것부터 자기 팀 페널티 박스 앞에서부터 혼자 전력 질주로 달려가 골을 넣는 장면까지(이 골은 나중에 푸스카스상까지 받았다) 다양한 골 장면들이 모여 있었다. 손흥민 선수는 소속 팀에 전담 키커는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골이 필드에서 나왔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골들이 하나같이 다 멋있었다.


누가 뭐래도 축구의 목적은 상대의 골대 안으로 골을 넣는 것 아니겠는가. 온 나라가 축구에 미쳐있는 영국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저 큰 경기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 축구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손흥민의 축구는 역사다.’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래, 나도 이 시대에 역사적 장면을 보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매달 결제되는 스포츠 TV 이용권도, 새벽 경기를 보는 일도, 틈만 나면 축구 유튜브만 보고 있는 것도 마땅한 일이 되어갔다. 그때 이후 나는 손흥민, 아니 우리나라 축구 역사를 빠짐없이 챙겨 보기 시작했다.


© 해원


집에서 멀고 먼 이웃 나라 영국의 축구를 화면으로 보면서 한 번쯤 직관의 열기를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주 고 퀄리티의 경기를 자기 동네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영국인들이 부러웠다. 홍성군 공설운동장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축구하는 것을 매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나의 현실은 영국은커녕 k리그 직관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애가 셋인 우리 집에서 나 혼자 가기는 뭐하고, 다 같이 가기는 힘들 것 같고, 재밌는 경기는 티켓을 구하기 어려워 번번이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 내가 뛰고 있는 동네 축구팀에서 프로 여자축구 경기를 보러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1시간 좀 안 되는 거리에 봉고차까지 대절해서 간다고 하니 기회다 싶었다. 그렇게 생애 첫 직관의 길을 나서게 됐다. 아이들, 그리고 함께 축구를 뛰는 팀 동료들이 다 같이 봉고차를 타고 가니 소풍이 따로 없었다. 마치 우리가 원정을 떠나는 기분도 들었다. 우리도 열심히 해서 언젠가 대회에서 상도 타고, 상금을 모아서 이런 봉고차를 사자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상상을 하면서 신나게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첫 직관의 설렘, 기대와는 대조적으로 여자축구의 현실은 허망하다 못해 비참했다. 아직 여자 축구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프로축구팀인데. 적어도 공설운동장 정도의 경기장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날 시합이 열리는 곳은 커다란 공원 제일 끝에 자리, 옆에서는 초등학교 축구단과 공원에 놀러 온 가족들이 함께 뛰어놀고 있는 곳이었다. 오버 한 스푼 보태자면(오버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올해 초 도 대회를 했던 곳보다 작아 보였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을 보며 직관의 열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좀 복잡했다. 


축구를 보는 건 너무 재밌는데, 자주 죄책감이 든다. 축구를 향한 열정에 숨어 그 이면의 상황을 자꾸 외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당장 내가 다녀왔던 여자 축구의 현실도 그렇고 매번 월드컵 개최지에서 벌어지는 인권 문제나 거대한 축구 시장의 자본과 권력 문제 등. 축구를 향한 엄청난 사회적 열기만큼, 거대하게 쏟아지는 자본이 고르게 분배될 리 만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프리미어리그를 진심으로 보기 시작하고 그들의 실력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엄청난 자본 규모였다.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자본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갓 입단한 어린 선수도 몇십억 이상의 연봉을 받고, 실력 있는 선수들은 시간당 약 1000만 원 이상의 주급을 받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보다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던 프리미어리그의 자본 규모를 뛰어넘은 사우디 리그가 나타났고, 비현실적인 그 숫자들을 보고 있으면 이제는 그저 하나의 사이버 머니를 보는 것 같다.


이제 축구는 하나의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엄청난 경쟁력을 자랑하는 거대한 시장이자 산업의 일부가 되었다. 그곳에서 뛰고 있는 축구 선수들은 기능이 우수하고 아주 비싼 하나의 상품처럼 느껴진다. 매년 여름과 겨울, 이적 시장이 열리면 전 세계 구단들은 자기 팀을 위해 선수들을 ‘사고’, ‘팔고’, ‘임대’한다. 처음에는 물건에나 쓰는 단어를 이렇게 사람에게 쓴다는 게 너무 이상하고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었는데 나 역시 금방 익숙해져 이제는 이런 말까지 한다. “다이어, 너 아직도 안 팔렸냐?” (돈이 이렇게 사람을 홀립니다)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 나는 일개 시민일 뿐이고,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축구의 모순과 나의 모순에 허우적거리더라도 나는 여전히 축구를 본다. 지나친 허무주의에 빠져 축구를 등져버리기에 나는 축구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거대 자본도 일말의 죄책감도 축구를 향한 나의 사랑과 열정을 꺾지는 못하고 있다. 


요즘은 화면 속 축구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뛰는 친구들의 플레이를 본다. 같은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 친구들의 움직임을 본다. 아직 실수도 많고 뚝딱거리는 일이 많지만 내가 공을 보내려고 하는 그 자리에 우리 팀 동료가 있을 때, 그곳으로 내 공이 잘 갔을 때 얻어지는 희열이 크다. 그래서 나는 그 희열을 느낄 때마다 다짐한다. 적어도 내가 하는 축구에는 값을 매기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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