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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Oct 20. 2023

축구에 진심

시골 여자 축구_10

© 바람



단발에 풍성한 곱슬머리인 내가 오랜만에 반 묶음을 하면 남편은 말한다.

“당신, 안정환이야?”


큰 아이가 학교에서 책 나눔을 하는 날 엄마를 위해 이런 제목의 책을 하나 골라왔다.

‘공포의 축구단’


둘째 아이는 아나바다 행사에서 엄마를 위한 선물로 이런 걸 사 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로고 메모패드’


우리 가족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축구에 얼마나 진심인지. 


매주 일요일은 나의 소속팀 반반 FC 훈련을 가는 날이다. 나는 금요일까지 할 일이 끝나지 않으면 이 일이 축구하러 가는 시간을 방해할까 봐 벌써 초조하다. 능률을 올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 일들을 빨리 해치울 수 있을지 궁리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축구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일정과 생활이 축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쯤 되면 나도 내가 궁금해진다. ‘나는 왜 이토록 축구에 진심인가.’


이렇게나 축구에 진심인 내가 며칠 전 미니 게임을 하는 도중 ‘축구 그만둬야 하나...’라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도 좀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축구를 하며 자책하거나 실망한 적은 있어도 하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훈련에는 원년멤버들이 많이 왔다. 오랜만에 그들과 한 팀이 되어 경기를 하는데 나만 너무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날 나의 플레이는 엉망이었다. 볼 컨트롤도 제대로 못하고, 패스 타이밍을 놓치고, 이상한 곳으로 패스를 보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경기 내내 그랬다. 공이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가니까 점점 위축 됐다. 의지가 꺾이기 시작했다. 점점 몸도 무거워졌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이랬는데. 몸과 마음이 모두 꺾여 버렸다. 자꾸 친구들이 달려가 열심히 수비하는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게 됐다. 우리 팀의 텐션을 담당하고 있는 나는 신나게 웃고 소리도 열심히 질렀지만, 사실 다 가짜였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당분간은 훈련을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꺾인 마음으로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는데 M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풋살 대회가 열린다고, 우리도 참여해 보는 게 어떻냐는 연락이었다. 처음으로 우리 팀 이름으로 공식대회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인원수나 정보 부족으로 항상 남에 팀에 껴서 대회에 참여했던 우리는 우리 팀 이름으로 대회에 나가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사람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선착순 접수라 오래 고민할 틈도 없이 인원을 모아 대회 신청서를 냈다. 신청서에 쓰여있는 이름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고 설레었다.


다시 의지가 생기니 털어놓고 싶어졌다. 신청서를 내고 나는 요 며칠 힘들었던 마음을 슬쩍 내비쳤다. 장난 반 진담 반 단톡방에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어제 축구하고 돌아와서 그만둬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나를 또 이렇게 자극시키는 축구… 블랙홀 같은 녀석… 후후…’


잠시 후 코치님에게 전화가 왔다.

“왜요! 누가 괴롭혀요?!”


코치님도 웃고 나도 웃었다. 나는 괜히 더 투정을 부린다.

“제가 문제예요 제가~~~~~ 저는 왜 맨날 이 모양일까요ㅠㅠㅠ”


코치님은 언제나처럼 헷갈리게 답을 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시작하는 건 좋은 자세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 있어요. 팀이나 제가 같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 일수도 있죠.”


내가 문제라는 건가, 팀이 문제라는 건가. 아니면 모두의 문제라는 건가. 코치님과 주장인 나는 팀을 이끄는 사람으로 함께 파트너십을 맺고 지내 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나도 코치님도 서로의 화법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코치님의 저 말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팀과 자기도 함께 도울 테니 혼자 앓지 말라는 얘기다. 위로가 됐다. 


코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축구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이 꼭 축구실력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경기장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보니 최근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갑자기 결정해야 하는 일,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일, 원래 많은 집안일 등으로 허둥대고 있었다. 그것도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마음이 좀 놓였다. ‘갑자기 축구가 싫어진 건 아니었구나.’ 안심이 됐다. 전화를 끊으며 코치님은 이제 우리는 굿 파트너가 된 것 같다고 했고, 나는 환상의 짝꿍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같은 팀 친구 BO에게도 전화가 왔다. 

“해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다른 말없이 내 이름 마지막 한 글자를 길게 늘여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느낄 수 있다. 그동안 축구를 하며 내가 자책하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아온 친구다. 어제 포지션 상으로도 내 바로 옆에서 뛰었던 친구이기도 하다. 심성이 착한 BO는 혹시 어제 자기가 놀려서 그렇냐고 물었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뭐라고 놀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코치님에게 털어놨던 이야기를 B에게도 한다. 이야기를 듣고 B가 말했다.

“그래도 해원이 아직 축구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BO도 나와 같은 마음이다. BO는 이번에 대회 준비 하면서 마음도 실력도 다시 잘 끌어올려 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함께 의지를 다지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스포츠의 매력이 이런 건가, 생각했다. 잘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꼭 한 번씩 한계에 부딪친다. 부딪친 다음에는 별수 없이 결과가 나온다. 그것이 시합이든 스스로와의 싸움이든 반드시 승패는 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만 다음이 있다. 


아이돌 덕질 하듯 열심히 축구를 보면서 느꼈다. 큰 경기를 뛰든 작은 경기를 뛰든, 잘한 경기 후에도 실컷 말아먹은 경기 후에도 어김없이 다음 경기가 있다. 선수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실망하고 분해도 그다음 스텝을 밟아야 한다는 것, 대승을 하나 대패를 하나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일어나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동안 ‘안 돼도 되게 하라!’는 식의 삶의 태도를 지니고 살았다. 그 태도는 고스란히 축구를 보거나 할 때도 나타났다. ‘어떻게든 이겨야지!’ 혹은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마음이 자꾸 생겨났다. 그런데 어떠한 상황에도 다음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보며 ‘끝난 건 끝난 거다.’라는, ‘인정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스포츠인의 태도를 배왔다. 그래야 다음이 있으니까.


더구나 축구 같은 팀 스포츠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 내가 처음 축구를 하러 나갔을 때, 축구는 다 좋은데 이 부분이 별로라고 생각했다. 나 하나 성장시키기도 바빠 죽겠는데 어느 세월이 다 같이 성장하나, 이런 마음이었다. 나는 여러 의미로 우리 팀은 참 이상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처음에는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자꾸 시합이 끝나면 서로의 마음을 물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어떤 점이 힘들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등등. 나는 그 시간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자주 도망쳤다. 상황상 거기 앉아 있을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마음들이 지금의 우리 팀을 만든 것 같다. 이제는 각 잡고 마음 상태를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제든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만두고 싶다는 투정 어린 말 한마디에 무슨 일 있냐며 물어주고 같이 해결해 나가자는 친구들이 있다. 이제는 그 친구들이 있어 축구를 나간다. 기쁘고 슬프고 괴로웠던 것들이 모두 추억이 되어 간다. 나는 우리 팀이 이상해서 좋다. 이제는 정말 한 팀으로 같이 성장해 나가고 싶다. 이제 축구가 좋은 건지 우리 팀이 좋은 건지 좀 헷갈리기도 한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이 둘 모두에게 여전히 진심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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