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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Jul 10. 2023

비키니 대신 브라탑

시골 여자 축구_9

© 해원



족구팀 아저씨들과 미니 경기를 하면서였다. 발제간이 좋은 아저씨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여성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몸이 닿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나는 아저씨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 더 열심히 달려들었다. 당황한 아저씨들은 나에게 공을 빼앗기거나 실수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뭔가 게임으로 치자면 나에게 새로운 아이템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조금 치사한 방법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괜히 으쓱하여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코치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해원, 이제 보니 아주 쌈닭이었네요.”


숨겨왔던 나의 본능이 자극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주 싸우고 제멋대로였던 어린이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면서는 좀처럼 싸울 일이 없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잘 싸워주는 남편이 항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내 본성을 들어낼 만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간혹(아니, 자주) 아이들에게만 숨어있던 거친 본성이 드러났는데, 그럴 때는 매번 부끄러웠고 언제나 후회했다. 그러나 축구를 하며 드러난 나의 쌈닭 본능은 부끄럽기보다는 기뻤다. ‘그래, 축구를 하려면 쌈닭 정도는 돼야지!’ 하는 비장한 마음도 생겼다.


그러나 몸빵으로만 대적하기엔 내 몸은 빈약하기 그지없기에, 요즘은 팔 쓰는 법에 대해 생각한다. 야수는 못 되더라도 쌈닭의 본능으로 재빠르게 상대를 낚아채고 먼저 어깨를 집어넣으며 치사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의 축구 기술로서 팔을 쓰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 또 코치님이 한 말이 떠오른다.


“축구에서 팔을 잘 쓰는 사람이 되면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발로 하는 축구에 왠 팔?’이란 생각에 의아했는데, 이제야 그 말 뜻을 알겠다. 하면 할수록 축구가 발로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모든 부분을 잘 쓸 줄 알아야 진정한 쌈닭 축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요즘은 날이 많이 더워져 운동장을 한 바퀴만 뛰어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잠시 쉬며 먹는 미지근한 물이 그렇게 달 수가 없다. 마지막 훈련으로 미니 경기를 할 때 팀 구분을 위해 망사 조끼를 입는데, 그 조끼를 받아 들 때면 입기는커녕 그 망사 조끼만 입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아, 웃통 벗고 싶다.’ 어젠가 인터넷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세상을 표현한 프랑스 단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오래전에 본 거라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한 장면이 있다. 조깅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환한 대낮에 한 여성이 웃통을 다 벗고 뛰어가는 모습. 출렁이는 가슴을 그대로 노출한 채 누구보다 가볍게 뛰어가는 그 여성의 모습은 시각적으로 느끼는 이질감과는 달리 보는 내 마음에는 굉장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요즘 같은 날씨에 훈련을 하다 보면 그때 그 여성이 자주 떠오른다. 남자들은 더우면 웃통 잘만 벗던데. 왜 나는 벗으면 안 되는지 심술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웃통 벗고 싶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코치님은 잠시 당황한다. 그런 코치님을 뒤로한 채 나는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나중에 우리끼리 한밤중에 모여 웃통 벗고 축구 한번 하자며 낄낄댔다.


올해는 몇 년째 실패 중인 ‘비키니 입고 수영하기’ 대신 ‘브라탑을 입고 축구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며칠 전 감격하며 봤던 ‘사이렌’이라는 프로그램에 브라탑을 입고 땀 흘리던 언니들의 모습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감동과 전율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특히 그녀들의 근육질 몸과 그 몸을 이용하는 능력에 감탄했다. 팔씨름 결승을 앞두고 “옛날에 팔씨름 대회에서 일등을 했는데 상대 애 팔뼈가 부러졌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방언니를 보고 울컥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여자가 팔씨름을 잘하고, 삽질을 잘하고, 덩치가 커서 각광받는 이 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곡절들이 있었을까. ‘사내놈 같이’라는 수식어 뒤에 얼마나 많은 놀림과 수모를 겪었을까. 그 시간들을 끌어안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사이렌 언니들의 모습에, 그리고 그렇게 다져진 근육질 몸매에 크게 감동했다.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실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얼결에 운동이 된 거지만, 또 생각해 보면 모든 운동이 그런 식이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을 살짝 빌려 표현한다면, 어쩌다 보니 생긴 ‘자연적인 연루’가 참여적인 연루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개인적인 불쾌함을 견디지 못해 맞섰을 뿐인데, 체육 대회에 나가지 못해 속상해서 상의했을 뿐인데, 그냥 보이는 대로 엄마를 그려 갔을 뿐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을 뿐인데. 사회가 욕망을 억눌러서 생겨나는 이런 작은 ‘뿐’들이 모여 운동이 되고 파도처럼 밀려가며 선을 조금씩 지워 갈 것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중 일부)


내가 축구 글쓰기를 하며 나도 모르게 ‘투쟁심리’가 생긴다는 말을 종종 써왔는데, 나도 모르게 생긴 이 마음의 이유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는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이었는데. 축구를 하며 한 계단 성장 하는 것이 나의 한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한계를 함께 뛰어넘는다고 느껴 왔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당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쪽의 대부분이 여성들의 몫이라는 사실이 자주 서럽지만 또 한편 그것을 넘어설 때마다 경계와 선을 지워가는 모습이 너무너무 멋지다. ‘누구 같이’가 아니라 그저 ‘나 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이 행위들이 그 자체만으로 운동이 된다는 사실이 서러웠던 내 마음을 조금은 다독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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