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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Sep 27. 2023

아랫집 어린이집

이름 없는 관계_2

© 해원


<윗집 일기>


막내 '우리'가 가방을 메고 집 밖을 나서자 남편이 물었다.

"'우리', 아랫집 가는 거야?"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니, 아랫집 어린이집 가는 거야 아빠!"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아랫집 어린이집'에 간다. 책장 이곳저곳을 뒤져 할아버지랑 읽고싶은 동화책 몇 권과 한글 공부책 한 권도 챙긴다. 자기 가방에는 가벼운 인형을 잔뜩 넣고 책이 든 가방은 무거우니 엄마에게 들어 달라고 한다. 나는 못이기는 척 '우리'를 따라 나선다. 밖에 나오니 '우리'랑 같이 걷고 싶어 비를 핑계로 조금 먼 길로 돌아 가자 했다. '우리'가 좋아한다. 짧은 길도 '우리'랑 가다 보면 볼게 많다. 지난번 장마에 형들이랑 만든 댐도 구경도 하고, 댐 위에 잔뜩 생긴 거품도 터트렸다가, 어제 밤 내린 비로 잔뜩 떨어진 도토리도 줍는다. ‘우리’와 나는 몇 미터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엉금엉금 걸어간다. 아랫집 어린이집 앞에서 할아버지 선생님을 만났다. 할머니 선생님도 밖으로 나오신다. 아침에 우리랑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드렸다. 


"'우리' 아빠가 '우리'한테 아랫집 가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아랫집 어린이집 간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할머니도 환히 웃으시며 말한다. 

"그렇지, 아랫집 어린이집 이지. 한글도 배우고, 만화도 배우고, 자연도 공부하고, 밖에서 운동도 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빠~"

우리는 나를 보며 '거봐, 내말이 맞지?'라는 표정으로 말한다.

"엄마, 한글 공부 책 가방에 넣었지?"

가방에 넣어 뒀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할아버지 손을 잡아 끌고 아랫집 어린이집으로 들어간다.



<아랫집 일기>


2023.9.21

'우리'와 동네 마실을 갑니다. 오늘은 어제 만났던, 도꼬마리 열매가 달린 곳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걸으면, 밋밋하고 심심한 길이 다정스레 말을 걸어옵니다. 가다가 밤 두 톨을 주워 주머니에 넣고, 나무 그늘이 짙은 길 한복판에 퍼질러 앉았거나 반쯤 누워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섭니다. 누가 빨리 달리나 내기도 하고, 도랑가에 핀 물봉숭아 꽃도 보고, 도꼬마리 열매를 따서 서로 던지며 갔던 길을 도로 올라옵니다. 길바닥에는 차 바퀴에 치여 죽은 목숨붙이들이 납작 눌러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마귀나 개구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죽은 모습을 몸짓으로 표현합니다. 아스팔트길을 맨발로 걸으며, 빗물에 쓸려 길 가운데에 모인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돌아올 땐 업어 달라고 조릅니다. 한 손으로는 '우리'가 벗어 놓은 신발을 들고 '우리'를 업습니다. '우리'는 내 목을 끌어안고, 등에 업혀 넓게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을 얘기해 줍니다.

"할아버지, 등이 왜 이렇게 하얘? 얼굴은 까만데."

"일을 해서 그렇지."

"아니야, 늙어서 그렇지."

"햇볕에 그을려서 그런 거래도."

며칠 전 이음이와 '우리'가 나눈 얘기가 떠오릅니다. "'우리' 너, 이제 어린이집에 가야지. 친구도 사귀고." 라고 이음이가 말하니까, '우리'가 "나는 할아버지 친구만 있으면 돼." 라고 말했습니다. 언제인가는 '우리'도 이음이나 울림이처럼 나비 따라 훨훨 날아갈 테지만, 나는 지금 '우리'와 함께 팔딱팔딱 가슴 뛰는 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습니다.


2023.9.23

#1. 어제 아침, 나와 ‘우리’가 주고받은 이야기

"아침에 뭐 먹었어?"

"김밥."

"엄마가 날마다 맛있는 것만 해 주는구나. 또 뭐 먹었어?"

"간식으로 맛있는 거 먹었지롱. 힌트 줄까. 파인애플 같은 거."

"사과."

"아니야. 또 힌트 줄까. ‘보’로 시작하는 거."

"'보'로 시작하는 게 뭐 있지? 포도?"

"아니야. 복숭아."

"그럼 '복'이라고 해야지."

"'복이라고 했잖아."

"할아버지한테 오다가 ‘ㄱ(기역)’이 빠졌구나. (똑바로 서서 오른쪽 팔을 직각으로 뻗어 몸짓으로 ‘ㄱ’을 나타내 보이며,) ‘기역’이란 글자 알아?"

"머리에 있는 '기억'인 줄 알았지."

"머리에 있는 기억?"

"생각 말이야."


#2. 미용실에 갔어요

어제는 '우리'가 미용실을 따라갔어요. 할머니가 머리를 깎고 나서 ‘우리’에게 “할머니, 예쁘지?” 하고 물었어요. '우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아요. "할머니, 예쁘다고 해 줘." 라고 보채도, 짧은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예쁘다고 말하기 싫다고 해요. 그럼, 그냥 괜찮다고, 깔끔하다고만 말해 달라고 해도, 안 된대요. 마침내, "'우리' 너, 지난번에 엄마가 머리 깎았을 때, 귀엽다고 말해 달라고 해서, 귀엽다고 해 줬잖아." 라고 넌지시 따지니 그제서야, "할머니, 괜찮아. 깔끔해." 라고 마지못해 말했어요. 할머니 얼굴이 환히 펴졌어요. 

나는 '우리'에게 묻지 않았어요. '우리'가 먼저 말을 걸어 왔어요. 손을 내 눈썹 위에 대며, 할아버지 머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손을 이마 끝에 대며, 여기까지 와서 짧아졌어, 라고 해요. 나는, '우리'와 맞붙어 칼싸움에 이기려고 짧게 깎았다고 말해 줬어요. '우리'는 정말이야? 하며 해맑게 웃었어요.


2023.09.26

# '보민' 된 힘을 빌려오다

농구를 하다 골이 잘 들어가지 않자 어디에서 힘을 빌려오려는 듯, '우리'는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붙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눈을 감습니다. 힘을 부르는, 주문 같은 것을 외길래, 나중에 무슨 말인가 물어보았어요. 처음엔 '보미(봄이)'라고 들려, 파릇파릇한 봄기운을 불러오나 했는데, 몇 차례 다시 물으니 '보민'이라고 했어요. '보민'이 무슨 뜻인지 물어 봐도 대답해 주지 않아 참 궁금했어요. 나도 '우리'를 따라 가부좌를 틀고 어떻게 힘을 불러오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내가 두 손을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붙이니, 그 건 (바둑) 알까기할 때나 그렇게 하는 거라며 '우리'가 자지러지게 웃어요. 그렇게 하면서 눈을 감고 초롱산 깊숙히 땅을 파고 들어가래요. 나는 그때서야 '우리'가 말한 '보민'이 '봉인'이라는 말임을 알아챘어요. 거기에 보이지 않는 힘이 보민(봉인) 된 채 감추어져 있는데, 꺼내 오면 된다는 거예요.

"야, 보민이 아니고 봉인이야!"

몇 차례 고쳐 주어도 소리내기 힘들다고 '우리'는 그냥 보민이라 하겠다고 우겨요. 도대체 그 말은 누구한테 들었느냐고 하니까, 이음이한테 들었대요. 봉인 된 힘을 어떻게 빨아들여 왔는지 '우리'가 힘껏 던진 공은 그대로 골망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저녁에 이음이에게 물어 봤어요, 봉인이 무슨 말인지. 이음이는 몸으로 대답했어요. 어딘가 깊숙한 곳에 갇혀, 팔짱을 끼듯 두 팔을 어긋나게 가슴에 꼭 붙이고, 꼿꼿이 선 채 얼음처럼 굳어 있었어요. 이게 봉인의 뜻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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