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해원
나의 유년은 기억나지 않는 시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농촌에서 보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가난과 사상에 쫓겨 수십 번 집을 옮겨다닌 부모님이 부산에서 공단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되려던 참이었다. 부산에서 입학 통지서를 들고 강화도 도장리 작은 마을로 향하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유년시절이다. 이후 두세 번 지역을 옮기고 대 여섯 번 집을 옮겼다. 강화도에서 충청도, 그리고 다시 강화도. 무너져 가던 한옥집, 컨테이너, 기숙사, 교회 사택, 빌라, 덜 허름한 구옥. 여러 지역과 집을 옮겨 다니는 사이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된 나의 첫 독립생활은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손때 뭍은 우리 집도, 딱히 고향이랄 곳도 없었지만 도시의 생활은 자꾸만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는 집도, 세 들어 살던 하숙집도, 친구와 함께 살던 단칸방 집도 이제는 모두 나의 집이 아닌 것 같아 방황하던 때에, 남편을 만났다. 갈 곳 없이 방황하는 나에게 언제나 반갑게 문을 열어 주던 사람. 나는 그 편안함이 좋아 매일같이 그 사람 집에 갔다. 그러다 그 사람과 결혼을 했고 몇 달은 그 사람 자취방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신혼집을 차린 곳은 전라북도 완주에 있던 작은 빌라였다. 큰 건물들 사이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볕이 잘 드는 집이었다.
완주에는 남편이 오랫동안 따랐던 선생님과 내가 오랫동안 같이 살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그 사실 만으로 완주에 가는 것을 결정했다. 남편은 그 선생님과 함께 일을 했고, 내 친구는 매일 저녁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아이를 돌보거나, 신기한 음식을 해 먹거나,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 주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들었다. 지금은 완주가 ‘청년, 귀촌, 귀농’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때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를 지원해 주는 정책이나 지원 사업 없이도 매일 재밌게 지냈다. 풍성하지는 못해도 매일이 꽉 차 있었다. 같이 밥을 해 먹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 사이 둘째가 태어났고 남편마저 백수가 되었는데 우리는 좌절하기보다 더 신나는 일을 찾아다녔다. 주변 친구들 역시 정신 차리라고 하기보다 더 열심히 놀아 보라고 응원해 주었다. 우리 부부와 나의 친구는 그동안 우리가 매일 하던 것을 조금 더 확장해 보자는 차원에서 시장에서 락 페스티벌을 하고 농사나 공동체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홍성에 와서 살게 된 것은 남편이 이곳으로 취직을 하게 되면서였다. 가정을 꾸리고 처음 살게 된 집, 처음 살게 된 지역,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 함께 사는 것을 꿈꿔보았던 사람들. 처음이 많은 곳을 떠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완주를 떠나 온 것은 그동안 집을 떠나 왔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런 게 고향을 떠나는 기분일까, 향수라는 게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였는지 홍성에서는 어울려 지내는 시간보다 조금씩 깊어지는 시간이 더 많았다. 불모지였던 완주와는 달리 홍성은 먹거리, 교육, 농사와 공동체에 대한 가치 등 이미 많은 것들이 이루어져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많은 어려움과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어찌 됐건 그 사실에 안주하면서도 자주 외로워지거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홍성에 처음 왔을 때, 여기서 이렇게 오래 살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완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살아 보거나, 최악의 경우 남편이 직장을 옮겨 도시에 가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은 항상 그래왔고, 정착이라는 말 또한 언제나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어찌 살다 보니 여기서 살게 된 지도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우리 아이들의 유년의 흔적은 대부분 홍성에 남겨지게 되었다. 매일 산책을 하던 아파트 단지 앞 산책로, 자전거를 처음 탔던 길, 아빠를 마중 갔던 정류장, 엄마가 지갑을 잃어버린 공원, 할아버지 밀차를 타고 가던 마을 길, 낙엽을 쓸던 마당, 땅따먹기를 하던 텃밭, 눈썰매를 타던 언덕, 밤놀이를 하던 학교 운동장. 어느 한 지역에, 어떤 공간에 한 인간의 생에 흔적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다는 것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 나는 조금 눈물이 나고 우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 공간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안심한다.
© 노해원
언젠가 집을 지을 땅을 찾아다닐 때 어느 마을 이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
“고향이 없다는 건 뿌리가 없는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때 생각했다. 자꾸만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갈 곳이 없어 떠도는 마음, 방황하는 마음, 텅 비어 있는 마음. 그것은 어쩌면 나에게 고향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누군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어난 곳은 부산, 유년시절은 충청도와 강화도, 독립은 서울, 가정을 꾸리고는 완주와 홍성. 언젠가 나의 흔적을 따라 한 바퀴 여행을 해 보고싶다. 그러면 나의 뿌리도 조금은 더 단단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