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집 그림 그리기에 슬럼프를 겪고 있다. 근 몇 달간(휴가까지 써가며) 그려온 도면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건축, 디자인, 설계 등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정보나 집을 짓는 마음에 있어서 남편은 나보다 항상 앞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했고, 슬그머니 한 발씩 물러나도 그럭저럭 괜찮았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휩쓸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가끔 이건 어때? 저건 어때? 하고 물으면 그때야 슬그머니 옆으로 가 의견을 보탰다. 남편에게는 집을 잘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보였고, 나는 그 능력을 믿었으며 심지어 남편은 그 일을 하며 매우 행복해했으니 이만하면 매우 괜찮은 궁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이 최근 바쁜 일정으로 인한 체력적 한계와 그동안 준비해 왔던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집 짓기에 대한 사기가 몹시 꺾이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나라도 뭔가 시작해 봐야겠다며 핀터레스트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마음먹고 둘러보기 시작하니 그동안 내가 집에 대해 딱히 취향이랄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한 발 물러선 채로 ‘깔끔하면 좋겠다.’ ‘편했으면 좋겠다.’ 같은 두루뭉술한 의견에만 머물러 있었지 방이나 창문의 위치와 크기, 벽과 바닥의 모양이나 색, 구조나 마감 디테일 같은 내 취향을 반영할 의견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축구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신이 나서 썼는데, 집에 대한 글을 쓰려면 항상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지난번 브런치북 팝업 스토어 전시를 준비하며 글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는 질문’을 뽑아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몇 시간이고 혼자 떠들 수 있는 관심사는?’ 나름 잘 뽑은 질문이라며 만족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는 그렇지 못한 글을 쓰고 있느라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핀터레스트를 뒤적거리며 핀의 갯수를 늘려가자 알게 되는 것, 혹은 질문하게 되는 것들이 늘어났다. ‘역시 부엌 가구는 아주 어두운 갈색이었으면 좋겠어.’ ‘현관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약간의 단차를 주고 발 높이에 창이 있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윈도우 시트나 책상 무지 좋음.’ ‘화장실 타일은 촘촘하지 않은 걸로.’ ‘마감은 역시 마이너스 몰딩인가.’ ‘창문은 커야 하는가?’ ‘부엌 상부장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이미지만으로는 덜 채워지는 것 같아 도서관에도 갔다. 집짓기 분야가 있는 서가를 쭉 둘러보는데 책으로 나온 집들은 대부분 너무 특별하거나, 과하게 멋지거나, 그래서 비싼 집들밖에 없고 그렇다고 전문적인 내용을 읽으려니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서관까지 발걸음 한 것이 아쉬워 이런저런 책을 빌려 오긴 했지만 역시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핀터레스트보다 인스타그램이 더 편한 사람이고, 취향이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하루 만에 찾아지는 것도 아닌데 역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 건가, 이런 걸 찾고 있는 것보다 어떻게든 다시 남편을 구워삶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며 다시 한 발 물러서려는 즈음에. 우연히 노석미 작가의 <서른 살의 집>과 다나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의 대하여>를 읽게 되었다.
<서른 살의 집>은 얼마 전 마을 나눔 장터에 올라왔는데 언젠가 동생이 재밌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서 가져온 책이고, <그늘에 대하여>는 내가 너무 좋아해서 자주 따라 하는 친구가 있는데 몇 년 전(10년 전 일수도 있다) 그 친구가 이 책을 극찬하는 것을 보고 대뜸 사놓고 전시만 해 두었던 책이었다.(사실 나는 이런 책이 엄청나게 많다) 집이라는 주제와는 상관없이 우연히 읽게 되었지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자주 집이 생각났다.
<서른 살의 집>은 노석미 작가가 서울을 떠나 처음 혼자 살게 된 설악면 집부터 포천읍-동두천-청운면에 있는 집들을 거치며 겪게 된, 혹은 그렇게 살아가기를 선택한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추천해 주었던 내 동생은 아마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여성 예술가로서의 공감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텐데 나는 주택살이의 어려움과 즐거움,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눈이 갔다. 추천사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하이쿠를 살짝 풀어놓은 수다인데 역시 거창한 드라마란 없다.”
노석미 작가의 삶은 대부분 대책이 없고 거창한 드라마 역시 없지만 대책 없이 평범한 삶에서 나오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집에 쌓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글이어서 이 연재를 시작하고 골머리를 앓는 나에게 적절한 환기가 되어 주었다.
<그늘에 대하여>는 아직 35 페이지 밖에 못 읽었지만(…)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전에 이 책을 꼭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일본 건축에서 다다미방, 화장실, 처마와 조명 등 그늘진 곳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며 시작한다. 밝고 환한 것을 추구하는 서양식 사고에서 벗어나 일본의 선조들이 예찬하던 그늘이 주는 깊은 매력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밝음과 어두움 사이에 ‘그늘’이라는 공간이 생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밝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밝지 않다고 해서 어두워지기만 하는 것은 아닌. 그 사이에 생겨난 그늘에 대해 궁금해졌고, 그것을 앞으로 우리가 지을 집에 잘 반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발견한 책들이 나의 취향을 강하게 자극했다. 결국 취향이라는 것도 삶에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억지로 노력하기보다 단어 뜻 그대로 그저 ‘마음의 방향이나 경향을 계속 하고싶어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극찬할 것이 생기면 다섯 보 정도 앞서가는 것이 특기인 나는 결국 책을 보고 너무 도취되고 말았고, 무작정 이런 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시, 대책 없이 가난한 삶도 낭만적이야”
(남편)“?!”
“너무 정 남향은 좋지 않은 것 같아.”
(남편)“?!”
내가 하는 질문의 방향성이 점점 이상해져 간다는 것을 느낀 남편은 자기라도 다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연필을 깎고 노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