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해원
책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간간이 들어오던 요청 중에 종종 라디오 인터뷰가 있었는데 그런 연락들은 주로 출판사를 통해서나 개인 메일, 혹은 DM을 통해 연락이 왔다. 그런데 한 번은 엉뚱한 곳을 통해 연락이 왔다. 처음 핸드폰에 ‘홍성여성농업인센터’가 찍혔을 때, 잠시 이번주에 내가 구매한 목록을 떠올렸다. 이곳에서는 주로 내가 물건을 사고 입금하는 것을 깜빡하여 받는 연락이 많았기 때문이다. 뚜렷하게 떠오르는 목록은 없었으나 그래도 뭔가 미안할 것 같은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농센터 직원분이 먼저 인사를 건냈다.
“안녕하세요, 여기 여농센터인데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제가 이번에는 어떤 걸 미납했나요?’라고 말하려는 순간 여농센터 직원분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해원씨 최근에 책 나왔죠? 소식 들었는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네요. 조만간 꼭 읽어보려고요. 하하.”
랩을 하듯 쏟아내는 그분에게도 왠지 모르게 나와 비슷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있어 보였다. 나는 그저 내 책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해서 어쩔 줄 몰라했고 그런 나에게 곧바로 본래 목적에 대해 전해 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홍동면사무소에서 해원씨를 찾는 전화가 왔어요. 대전에 국악방송 라디오에서 해원씨를 섭외하고 싶은데 번호를 알 수 있겠냐고요. 그래서 해원씨 번호 전달해도 될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짧은 통화를 하며 순식간에 여러 감정이 지나갔다. 순간의 안도와 순간의 당황, 그리고 뒤늦은 놀라움. 대전국악방송 라디오에서 나를 찾기 위해 홍동면사무소에 전화를 하고, 면사무소 직원이 홍성여성농업인센터에 전화를 하고 홍성여성농업인센터 직원이 나에게 전화를 거는 상황이라니. 이 사건의 발단은 아마 나의 책 <시골, 여자, 축구>의 첫 문장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가 지금 뛰고 있는 축구팀인 반반FC는 2021년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생긴 여자 축구팀이다.’
나는 올해로 홍동에 살게 된 지 8년 차 주민이다. 이만치 살고 보니 지역에서 두 다리만 걸치면 번호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움직이는 동선이 정해져 있으며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일정하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거리를 파악하게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범위 역시 알게 된다. 농촌이 흘러가는 일 년의 흐름을 대충 파악하고 있으며 그 흐름이 맞춰 사는 이웃들의 움직임도 얼추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에서 언제나 같은 움직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주는 안정감. 그것이 8년 차 주민이 누리는 행복이다.
그럼에도 북토크에서 우리 동네에 대해 소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자주 말문이 막혔다. 운 좋게 책이 나온 뒤 열 번이 조금 넘는 북토크를 했는데, 그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도대체 그 동네는 어떤 동네인가요?”였다. 어떤 동네이길래 이런 축구, 이런 관계, 이런 응원이 가능하냐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이곳에서 사는 것도 이곳에서 누리는 것도 너무 당연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자주 길을 잃었다. 몇 차례 제대로 답을 못하고 나니 그런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서 간단히라도 우리 마을에 대한 소개 거리를 정리해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고퀄리티의 지역 전문가가 언제나 내 옆에 있었고, 나는 그의 정보와 기술, 삶의 노하우를 날로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요량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여보, 다음 북토크에서 누가 또 이 동네에 대해 궁금해하면 뭐라고 설명해 주면 좋을까?”
그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느꼈는지 웃으며 나에게 바짝 다가왔고, 나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한마디 덧붙였다. “간단하게.” 남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1958년도에 농업 농촌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시골에 작은 학교를 만들었어. 그 학교가 풀무학교인데, 대장간에서 풀무질(불을 지필 때 바람을 불어넣는 것) 하듯 농촌의 일꾼을 키우기 위해 설립된 학교로 ‘위대한 평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학교의 목표였지.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자연과 사람, 농업과 농촌에 대해 고민하고 지역사회를 살리기 위한 역할을 하다 보니 대안학교가 되었고. 90년대부터는 풀무학교 졸업생들을 필두로 우리나라 최초로 오리농법이 동원 되어서 친환경 농업을 거의 최초로 한 곳이야. 최근에는 풀무학교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초, 중, 교가 마을교육 공동체로 활발히 연결되어서 지금은 농업을 넘어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지. 지금 홍동면에는 30-40개의 모임들이 있고, 그래서 다른 농촌에 비해 청년들이 많다는 것도 큰 특징이야.”
막힘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남편을 보며 오랜만에 그가 박사님 같아 보였다. 그리고는 박사님 답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내 논문에 다 나와.”
요약하자면 이 동네에는 건강한 먹거리, 건강한 교육, 무엇보다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 인 것이다. 그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들으니 새삼스레 내가 사는 지역에 특별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특히 많은 면에서 건강함을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끔 나의 삶이 너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초중고를 100명 안 되는 작은 시골 학교를 다녔고, 심지어 대학교도 전교생이 2000명 안팎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귀촌해서 마을 단위의 공동체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나의 우물은 작아도 너무 작은 것인 아닌가, 하고.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면 나의 우물이 작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작은 우물 안에서도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물의 크기 역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우물은 그 크기에 맞춰 조금씩 천천히 변해갈 것이다.
이제 곧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한다. 오늘은 쓰레기봉투를 받으러 면사무소에 갈 것이다. 그곳에서 다자녀 혜택으로 매달 8장씩 쓰레기봉투를 받은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장부에 싸인을 하려고 보면 언제나 낯익은 이름들이 적혀 있다. 쓰레기봉투를 받는 곳은 복지과 여서 담당 공무원들이 가끔 아이들 안부를 묻는다. 아이들과 함께 가면 보급용품(휴대용 선풍기, 진드기 스프레이, 조미김 등)을 주기도 한다. 그곳에서 나를 찾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쑥스러워서 물어보지는 못 할 테지만 상상만으로 한 뼘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