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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가 태어났다

by 노해원



수술실에 들어간 동생을 기다리며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몇자 끄적이다 자꾸 핸드폰과 시계에 눈이 가서 얼마 못가 그만뒀다. 초조한 마음에 괜히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동생이 한참 전에 보내준 편지를 꺼냈다.


결혼과 출산을 앞둔 동생을 보며 나는 자꾸 겁쟁이가 되었다. 동생 앞에서는 그거 다 별거 아니라고 으스대놓고 뒤돌아서 온갖 걱정을 쌓아 뒀다. 자꾸 고된 날들만 떠올랐다. 그 길을 고스란히 지나 올 동생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쓰렸다. 무엇이든 유보하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열어보지 못하는 날이 늘어 갔다. 결혼 전에 보내준 청첩장도, 결혼하고 보낸 편지도, 아기를 낳기 전에 보낸 엽서 한 장도 한참이 지나서야 열어봤다. 나를 바짝 쫓아오는 동생을 아직은 조금 더 멀리서 보고 싶어서 최대한 오래 숨겨 두었다. 편지를 열어보지 않는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묵혀 둔 편지를 수술실에 들어간 동생을 기다리며 겨우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열 살 무렵부터 변함없는 글씨로 ‘언니’ 하고 시작하는 그 편지를 읽으며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엉엉 울면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핸드폰과 시계와 그 편지를 읽으며 나는 조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나 제왕 해야 된대.” 출산일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 날 동생이 말했다. 역아였던 아이가 출산일이 다 되어서도 몸을 돌리지 않아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예정일은 일주일이 앞당겨졌다. 속상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떨리고 겁난다는 동생에게 우리나라만큼 제왕 많이 하는 곳이 없다고, 외국에서는 웬만하면 자연분만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웬만하면 제왕절개를 한다고, 그러니까 그만큼 기술이 아주 뛰어난 나라라고 평소답지 않게 논리 정연하고 씩씩한 말로 동생을 달랬다. 그래놓고 나는 또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수십 가지 걱정을 했다.


20분이면 끝날 거라던 수술이었는데 1시간이 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시계와 편지를 번갈아 보며 계속 울고 있었다. 아기와 산모가 무사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아무에게나 빌었다. 어쩌면 견뎌내는 동생보다 기다리는 내가 더 겁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30분이 더 흐르고 나니 더 이상 나올 눈물도, 기다릴 수 있는 참을성도 바닥나서 결국 동생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10분쯤 후에 답장이 왔다.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5분, 초록색 커다란 병원 수건 위에서 갓 나온 팔다리를 어쩔 줄 몰라 힘주어 울고 있는 갓난아기의 영상이 도착했다. 눈도 아직 제대로 뜨지 못한, 태명처럼 방울토마토 같이 빨갛고 동그란 아기였다. 이제 막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아주 작고 반짝거리는 생명이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다시 2시간 반, 병원 침대 위 하얀색 이불에 싸여 퉁퉁 부운 눈을 겨우 뜬 동생의 사진이 도착했다. 이제 막 눈을 뜬 아기 사진보다 더 반가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우리나라 산부인과 기술력 뛰어난 거 맞네, 그제야 내가 한 말을 나도 믿게 되었다.


애태우며 기다리던 조카가 태어난 지 이제 30일 남짓. 나는 요즘 동생에게 매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애기 사진 좀 보내봐.” 동생과 동생의 남편을 반반씩 닮은 아기가 매일 다른 얼굴로 나를 반긴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또 본다. 그것도 모자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준다. 오늘은 너 닮았다, 오늘은 네 남편 닮았다, 오늘은 울림이도 닮고 우리도 닮고 이음이도 닮고 나도 닮았네, 하면서. 어떻게든 서로의 닮은 구석을 찾아낸다.


내가 큰 아이 울림이를 낳았을 때 내 동생은 열아홉 살이었다. 나는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었고, 동생은 출산한 언니를 보필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학교에 체험학습을 쓰고 일주일간 같이 지냈다. 남편은 완주에 집을 구하러 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집을 나간 고등학교 이후 아주 오랜만에 네 식구가 같이 살게 된 거였다. 많은 것이 변해 있었고, 많은 것이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끈으로 꽁꽁 묶여 있다는 것은 그대로였고 내가 엄마가 된 것과 나를 엄마로 만들어준 아기가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그 변화에 가장 적응하기 어려워했던 것은 동생이었다. 동생은 너무 작은 아기를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귀여워하다가, 밤이 되면 학교에선 보지 못했던 시트콤을 몰아 봤다.(체험학습의 진짜 목적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저녁 8시만 되면 울던 나를 잠시 나가 있으라 하고는 혼자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부르던 앳된 동생의 모습. 내 눈에는 여전히 앳되기만 한 동생이 엄마가 되었다.


동생과 나는 네 살 차이가 나는데 어린 시절 우리는 가끔 잘 놀고 맨날 싸우는 사이였다. 서로 악다구니를 쓰다가 내가 무력을 행사하고 동생이 울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동생은 지지 않고 대들었고 나 역시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주로 힘)을 쓰며 대응했다. 스무 살 무렵 빨간 모닝 뒷좌석에서 서로 주먹다짐을 한 이후 힘 싸움은 청산하고, 이제는 동등한 위치에서 누구보다 의지하며 지낸다. 엄마가 왜 그렇게 형제가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는지 알겠다, 아버지 사주에 있었다던 남동생 하나 더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얘기를 하면서 우리만 아는 농담들을, 한 점의 가식 없이 웃고 떠드는 시간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한다. 그 사랑 안에 깊이깊이 새겨진 우리의 우정이 나를 단단하게 지켜준다.


동생의 출산을 기다리면서 열어본 편지 끝자락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오늘은 어릴 때 학교 끝나고 같이 집으로 걸어 올라가던 그때가 생각나네. 내가 자꾸 딴짓하고 느리게 가서 언니가 짜증 내며 먼저 갔지만 눈에 보이는 정도로만 빨리 가서 맞춰주던 모습.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가서 언니에게 뛰어가서 안기고 싶어. 언니를 꼬옥 안아주고 싶어.”


나는 이제 더 이상 유보하지도, 편지지 안에 꽁꽁 숨겨 두지도 않으려 한다. 나를 향해 힘껏 달려오는 동생을 정면에 서서 두 팔 벌려 환영해 주고 싶다. 고된 일상, 그 속에 아픔과 상처, 그럼에도 그것을 충분히 껴안을 수 있는 사랑과 용기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더 너른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줄 나의 조카 수림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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