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어린이 2025년 겨울호>, 어린이와 세상, 어린이책과 북클럽 8
올해 초등학생이 된 막내 ‘우리’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밖에서 구경만 하던 학교를 다니게 되어 신났는지 한동안 집에 오면 가방도 벗지 않은 채 나에게 달려와 여러 가지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날도 뭔가 재밌는 일이 많았는지 밝은 표정이었다.
“엄마, 오늘 아침에 어떤 누나가 우리 교실 와서 책 읽어 줬다?”
동생의 부탁이라면 귀찮아하기 바쁜 형들이랑만 지내다가 제 발로 찾아와 책을 읽어 주는 어린이의 존재가 제법 신기하고 놀라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것이 몇 해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책 선배’ 활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책 선배의 존재를 다시금 접하게 된 이후 계속 그 활동이 궁금해졌고 종종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됐다.
“누나들이 요즘도 책 읽어 줘?”
그러면 ‘우리’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무심히 말했다.
“당연하지. 어제도 와서 읽어 줬어. 매주 화요일이야.”
요일까지 외운 것을 보니 ‘우리’가 이 시간을 깨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사람은 언제나 반가운 사람일 것이다. 책을 읽어 주는 어린이와 그 어린이를 기다리는 어린이의 모습을 상상하면 든든함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이른 아침부터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책을 읽는 어린이들의 얼굴을 문득문득 떠올리며 궁금한 것들이 쌓여 갔다. 이 모임을 꾸준히 이어지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린이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책을 고를까? 어떤 마음으로 책을 함께 읽을까?
책 읽어 주는 어린이들
홍동초등학교에서는 매주 화요일 아침 8시 40분부터 10분간 책 선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고학년이 저학년에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인데, 책 선정부터 프로그램 진행까지 모두 아이들이 스스로 한다. 학기 초에 도서부가 5, 6학년 대상으로 책 선배를 모집하면 지원자들이 각각 1, 2, 3학년 교실로 찾아가 책을 읽어 준다. 1학기에는 일곱 명이 함께했는데, 지금은 다들 바빠져서 세 명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5학년이 된 선율이는 오랫동안 책 선배 활동을 꿈꿨다고 한다.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많아 누가 읽어 주는 걸 듣던 때가 마음은 더 편했다고 말하면서도, 바라던 일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선율이의 표정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저는 3학년 때부터 책 선배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3학년 때 언니들이 와서 책을 읽어 주는 게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았거든요. 근데 6학년부터 할 수 있다고 해서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올해부터 5학년도 가능하다고 해서 바로 신청했어요. 1학년 교실로 가고 싶었는데 1학년 교실로 배정돼서 정말 좋았어요. 1학년 동생들이 너무 조그맣고 귀여워요.”
꼬박 2년을 기다려 책 선배를 하고 있는 선율이는 기다린 시간만큼 책 선배 활동을 향한 열정이 대단했다.
“책은 제가 읽었던 책 중에 재밌었던 책 위주로 골라요. 인권, 문화, 종교 이런 것들을 분류해서 고르기도 하고, 저희 엄마가 1학년 담임 선생님이셔서 도움을 받기도 해요. 매주 하려니까 동생들이 안 읽어 본 책을 고르는 게 좀 힘들긴 하더라고요. 봤던 책 읽어 주면 재미없잖아요. 동생들이 지루할까 봐 퀴즈를 내 준 적도 있어요. 늦게 와서 같이 못 본 친구들을 위해서 칠판에 읽은 책을 적어 두고 가기도 해요. 요즘은 안 읽어 본 책들을 빌려 가서 미리 읽어 보고 거기서 재밌는 것들을 읽어 줘요. 앞으로는 줄글 책을 읽어 줄까 고민하고 있어요. 책을 읽어 줘야 하니까 목소리도 크고 발음도 좋아야 해서 집에서 나름대로 연습도 해요.”
2025년 2학기에 책 선배가 읽어 준 책은 『나랑 뽀뽀하고 싶어?』(아니타 레만 지음, 카샤 프라이자 그림, 서현주 옮김, 다그림책 2025), 『빨간 벽』(브리타 테켄트럽 지음, 김서정 옮김, 봄봄출판사 2018), 『여자가 되자!』(요헨 틸 지음, 라이문트 프라이 그림, 이상희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2020), 『신기한 씨앗 가게』(미야니시 타츠야 지음, 김수희 옮김, 미래아이 2016) 등이었다고 한다.
선율이와 같은 학년인 서연이와 서윤이는 엄마 아빠가 ‘책아마’(책 읽어주는 아빠 엄마)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책 선배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것과 직접 하는 것의 차이를 느끼고 있다며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책 선배 하기 전에는 책아마가 아침 시간에 책을 읽어 줬거든요. 그때 저희 엄마랑 아빠도 했는데 전날 같이 책도 고르고 그랬거든요. 그때 재밌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 책 선배를 신청하게 됐어요. 그동안 책 선배 언니 오빠들이 책 읽어 줬던 게 고마워서 저도 동생들에게 뭔가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그런데 막상 직접 책을 고르려니까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좀 어려웠어요. 학년별로 읽어 줄 수 있는 게 다른데 동생들이 재밌어할 것을 찾아야 하니까요. 열심히 골라서 가져가도 동생들이 잘 안 들어 주면 힘들기도 하고요.”
책 선배의 등장
홍동초등학교 책 선배 활동은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시작됐다.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기 위해 교실을 드나들었던 책아마가 더 이상 학교에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닫혀 있던 학교가 겨우 문을 열었을 때 학교에는 오직 재학생과 선생님, 학교 관계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책아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을의 한 어린이집에서 시작된, 10년 가까이 이어져 오던 모임이 중단될 위험에 놓이자 아이들이 직접 해보겠다며 나선 것이다.
“홍동초에서 책아마가 10년 가까이 활동을 했으니까, 도서관에 워낙 좋은 책들이 많았어요. 홍동초는 작은 학교라서 사서 선생님이 따로 없으니까 책아마한테 자주 추천을 부탁했거든요. 그때 ‘나다움 어린이책’ 선정 목록에 있는 책들을 많이 구매했고요. 매년 양육자에게 추천받는 도서 목록도 적극적으로 권장했고요. 그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꺼내도 훌륭한 책이 나오는 순간이 온 거죠. 그래서 아이들이 책아마를 대신해서 책을 읽어 주겠다고 했을 때 큰 걱정은 없었어요. 오히려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이 컸죠.”
마을에서 오랜 시간 책아마 활동을 해 왔던 샤크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매주 활동을 이어 왔다. 책 읽기를 기다리는 친구, 별로 관심 없는 친구, 싫어하는 친구 등 모두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지만 아이들과 책을 통해 꾸준히 소통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이 아주 컸다며 밝게 웃었다.
“저학년 반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우리끼리 은혜받았다고 했어요. 아이들이 마치 나를 빨아들일 것처럼 몰입해서 보거든요. 아무래도 학년이 올라가고 글자를 잘 알게 되면 책 읽어 주는 시간에 흥미가 떨어져요. 혼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책 선배는 저학년 아이들에게만 읽어 주지만 책아마는 고학년 반에도 들어갔어요. 한번은 제가 고학년 반에 성교육 책 『가르쳐 주세요!』 (카타리나 폰 데어 가텐 지음, 앙케 쿨 그림, 전은경 옮김, 비룡소 2016)를 들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친구가 “저는 이 책 싫어요, 그거 안 읽어 줬으면 좋겠어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읽어 주는 건데 불편하면 읽지 않아도 돼. 그런데 혹시 나중에라도 궁금해지면 가져가서 읽어 봐.” 하고 두고 온 적도 있어요.”
책 선배의 첫 시작을 함께 했던 단아는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단아는 어릴 때 경험했던 책아마 활동에 대해 즐겁고 편안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책을 읽어 주러 오는 어른들이 대부분 마을에서 자주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아마가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책 선배 활동을 신청하게 되었다며 처음 책 선배를 준비하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제가 책을 좋아하니까 그냥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주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학년이 높아지니까 책 선정할 때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내가 저 친구들 나이 때 좋아하던 책이 뭐였지?’ 하면서 도서관을 찾아보게 되고, 도서관에 없는 책은 따로 집에서 챙겨 오기도 했어요. 그동안은 나 중심으로만 책을 읽다가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읽어야 하니까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더라고요. 말로 뱉어야 하니까 감정도 더 담게 되고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게 많았던 기억이 나요.”
책 선배를 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냐는 질문에 이런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처음 책 선배 활동이 시작됐을 때 4학년부터 신청을 받았어요. 4· 5· 6학 년이 1· 2· 3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책을 읽어 주는 걸로요. 저는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3년 동안 책 선배를 했어요. 그런데 4학년 때 처음 들어가게 된 반이 하필이면 3학년이었어요. 제가 그 반 친구들이랑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거예요. 또 다들 같은 마을에 사니까 자주 보던 친구들이 많아서 괜히 창피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서 바로 더 어린 학년 반으로 바꿨어요.”
함께 그림책 읽는 사이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던 시간을 떠올려 본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와 얼른 읽어 달라던 목소리,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에 푹 빠져 있던 반짝이는 눈, 이야기가 끝난 후 한껏 밝아진 얼굴. “책 한 권만 있으면 아무것도 없이 행복할 수 있고 재밌을 수 있어요.”라던 서연이와 “책을 좋아하다 보니 지금은 책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됐어요.”라던 단아의 얼굴. 마츠이 타다시(松居 直)는 『어린이와 그림책』(초판 샘터사 1990; 개정판 2012)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를 나누고 즐거움을 나누며 확실하게 마음을 교류했다는 실감은 어린이가 성장한 뒤에도 남게 됩니다.”
책을 함께 읽는 사람들은 서로의 성장을 도모한다. 같이 볼 책을 고르며 고심하는 행위에는 타인을 이해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책 선배 활동을 이어 가는 아이들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내가 받은 좋은 기억을 나도 나누어 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언젠가 또 다른 어린이들에게, 혹은 자신의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는 날을 상상해 본다. 함께 책을 읽던 순간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더욱 빛나게 되리라 생각하면 햇볕을 잔뜩 먹은 이불처럼 마음이 포근해진다.
나는 이제 둘째 이음이가 5학년이 되는 날을 기다린다. 그날이 오면 가장 먼저 이렇게 물어보려 한다. “이음아, 너 책 선배 신청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