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 Postino - Luís Bacalov
LifeBGM보다 오래된 나의 업적이 있습니다. <낭만응원단>의 응원단장입니다. <낭만응원단>의 단원은 응원단장 한 명입니다. 단장은 꽤 오래전부터 우편으로 낭만을 부추기는 편지를 가끔 보내는 일을 합니다. 정기적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낭만은 불시에 찾아가고 익숙하고 지루한 길가에 문득 멈춰서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낭만응원단의 편지는 주로 봄결에 시작됩니다. 카드명세서나 광고, 공문서가 아니면 채워질 일 없는 우편함에서 뜬금없고 일상과 떨어진 글자가 발견될 때, 조금이라도 낭만이 들어갈만한 틈이 생기기를 바라는 간지러운 마음입니다. 그리 대단한 마음은 아닙니다.
작년과 올해는 <낭만응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작년에는 단장에게 낭만이 고갈되어 나눠 줄 낭만이 없었고 올해는 편지를 받을 사람 공모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동안의 리스트에 있는 몇 사람에게는 불시에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두 해 동안 응원단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불쑥불쑥 들곤 합니다. 친구에게 택배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 갈 때나 지갑 동전 칸에 늘 들어 있는 우표 두 장을 볼 때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젖곤 합니다.
사람들이 좀 더 낭만적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는 일이라는 게, 타고난 낭만을 하나 둘 버려야 하는 험한 뱃길인 걸 알면서도 꼭 태풍 부는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굶주린 몸을 위해서만 살지는 말자고 고집부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삶이 사람을 갉아먹는다는 무서운 사실을 이천 년이 넘는 역사 동안 많은 이들이 증언했습니다.
낭만을 사랑한다는 말은 곧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동안 줄곧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뒤에서는 응원단장으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고 엽서를 쓰고 일주일씩 걸리는 긴 우편배달 과정에 낭만을 실어 보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만큼 낭만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미운 사람, 만일 낭만이 있었더라면 그가 나에게 미운 짓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겁 없는 추측을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혹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자욱한 흔적을 더듬는 마음이었습니다. 더 미워하지 않기 위해 낭만의 이름을 빌린 것입니다.
on Il Postino - Luís Bacalov
메타포가 파도처럼 물결치면(영화 <Il Postino>의 대사) 루이스 바칼로브의 우편배달부 음악을 듣습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흙길을 달리는 영화 장면을 떠올리면서 음악을 들으면, 고갈되었던 낭만도 발버둥같이 처절하게 끌어올리던 낭만도 저절로 물결치며 차오릅니다.
낭만은 이렇게 옵니다. 이렇게 갑니다. 나는 편지처럼 가는 낭만을 보냅니다. 봉투에 담길 만큼의 분량으로 함축되고 종이 뒷면에 오돌토돌한 펜 자국이 남는 정성으로 갑니다. 무슨 글자인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뭉개진 악필의 흔적을 밝혀내기 위해 한 번 더 문장을 읽어보도록 꾹꾹 눌러써서 갑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날씨가 참 좋지요, 봄의 씨앗입니다, 같은 사소한 인사말로 시작해서 사소한 이야기로 끝냅니다. 가끔은 좋아하는 문장이나 그때 마침 듣고 있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봉숭아 씨앗만큼 작은 이야기입니다.
내 친구는 결혼 전에 나에게 터키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말도 없이 혼자 훌쩍 떠난 여행에서 나에게 보낸 편지에는'그래도 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고.' 라고 쓰인 문장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나에게 낭만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낭만은 인생의 사치같이 느껴지고 대단한 말들과 큰 음향으로 울립니다. 굉장한 비용을 들인 영화나 연극, 다수에게 동시에 도달할 수 있는 매체를 빌려서 전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럴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여기에 적는 문장들도 때로는 극본으로 써서 예쁜 얼굴의 예쁜 목소리로 울린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나는 압니다. 낭만은 그런 대단한 것으로 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낭만응원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진정한 낭만은 발신인과 수신인이 정확하고 봉투를 뜯고 접힌 종이를 펼쳐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수수한 비밀스러움으로 옵니다. 나의 뒷마당에 피는 작은 꽃으로 옵니다. 우리는 마음먹고 큰 들판에 나갈만한 여유 없이 살고 시간과 거리의 야속한 문제를 뛰어넘을 용기는 생에 몇 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생애에도 낭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단칸방에 쉰내가 나기 시작하는 밥공기 앞에서도 시를 쓰던 내 스승의 서글픈 청년기에도 있었던 낭만을 빌려 씁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쑥쑥 자라는 아기를 돌보며 일하는 엄마들의 웃음을 빌려 낭만을 씁니다.
음악을 한 번 더 들으면서 내일은 꼭 <2025 낭만 응원단>을 모집해야 했습니다. 무섭게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6월이 되면 무어라도 시원해야겠습니다. 에어컨 사줄 만한 형편은 못되어도, 잠깐 바칼로프에게 빌린 섬바람을 실어, 낭만응원단장의 편지가 갑니다.
Recital <LA MERAVIGLIOSA AVVENTURA DEL TAN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