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entenfutter, 땅콩!
땅콩, 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땅, 과 콩, 모두 이응 받침이 있어 입 속에서 소리가 동그랗게 울리는 게 좋다. 동그란 콩의 모양이 연상된다는 점도 제법 귀엽다. 또 ㄸ, ㅋ의 거센소리와 된소리가 자모로 있다는 점도 좋다. '당공'과 '땅콩'은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다. 당공은 당-공, 하고 늘어지는 지루한 발음이라면 땅콩,은 짧고 경쾌하며 발랄하게 발음된다. 땅, 과 콩, 사이에 관계도 또한 그렇다. 단독으로도 의미가 충분하다. 땅과 콩은 각자로도 큰 군락을 이루는 대표 단어들인데 둘이 붙어 있으니 두 나라의 왕국의 평화협정을 이뤄내는 우정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둘 다 대단한 왕국의 대표이기 때문에 두 단어 모두 충만하게 발음해야 한다. 그러니까, 땅! 콩! 하고 하나씩 따로따로. 땅.콩.
맛도 그렇다. 땅 위에서 자라는 콩들에게는 없는 땅의 맛이, 조금 더 교양 있게 말하자면 흙의 깊고 그윽한 맛이 느껴지는 콩이다. 잎색과 똑같은 완두콩이나 누가 봐도 열매 같은 작두콩, 속여볼래도 씨앗 같은 백태(두부콩)와 달리 땅콩은 겉껍질과 껍질, 알맹이의 색이 다 땅과 관련된 티를 내며 독자적이다. 구우면 진짜 땅색이 돼서 혀가 뿌득 뿌득할 정도로 기름진 맛을 낸다.
생땅콩은 조금 다르다. 다른 나라에서도 삶은 땅콩을 먹는지 모르겠다. 9월 말에서 10월이 되면 우도나 강화도에서 갓 수확한 생땅콩을 판다. 위에 줄기와 잎까지 같은 있는 채로 시장에 나온 섬 출신 생땅콩은 잘 씻어서 삶아 먹는다. 삶은 땅콩은 땅의 순한 맛이 난다. 부드러운 땅은 꼭 그런 맛이 날 것 같다. 굽거나 볶은 것보다 깔끔하고 청량한 맛이라 더부룩하지 않다. 그때에는 메주콩이나 작두콩과 비슷한 맛을 내기도 한다.
제철에 먹는 생땅콩, 삶은 땅콩보다 구운 땅콩은 조금 더 성격이 강하다. 불길을 거치고 나온 땅콩은 기름져서 훨씬 더 고소하고 진해서 비옥한 땅의 맛이 난다. 손톱보다도 작은 한 알 땅콩에 얼마나 진하고 고소한지 한 알만 먹어도 입 안에 향과 맛이 오래 남는다. 가끔은 땅콩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땅콩은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외가로부터 내려온 입맛이다. 외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단맛은 '땅콩 캐러멜'이었다.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엔 꼭 엄마와 수퍼를 들러 땅콩캐러멜을 한 봉지씩 샀다. 손가락 한 마디 길이에 투명한 비닐로 포장한 땅콩캐러멜부터 조금 더 짧아지고 작아진 대신 색색으로 포장한 땅콩캐러멜까지 가리지 않았다. 그 맛을 일찍부터 깨친 나는 할아버지의 땅콩 캐러멜을 두 개, 세 개씩 꼭 받아먹었다. 사실 땅콩이 들어간 과자는 다 좋아하셨다. '오징어 땅콩'이나 '캐러멜 땅콩', '땅콩강정'은 좀처럼 군것질을 하지 않는 외할아버지가 가끔 사 먹는 과자들이었다.
나에게 외할아버지는 땅콩과 단내가 나는 사람이었다. 마른 체구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선한 인상의 할아버지는 땅콩 같은 고소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땅콩이 두 쪽인 것처럼, 보통의 땅콩은 두 알씩 눈사람모양으로 짝으로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돌보던 사랑꾼이었다. 단출한 살림에 땅콩같이 위-아래로 방이 있는 자그마한 세간이 얼마나 고소하고 다정했는지 나는 기억한다. 땅콩 과자와 땅콩 캐러멜이 가끔 뒹구는 작은 방은 누추하지도 비좁지 않았다. 작고 고소한 맛이 깃들어서 맘 편히 뒹굴며 옛날 전래동화책 읽어주는 목소리를 듣던 시절이 영글었다. 소박한 땅콩의 맛을 알던 사람들의 집은 다 그렇다.
지금은 땅콩 캐러멜을 잘 먹지 않는다. 대신 종종 독일에 여행이나 출장을 가는 지인에게 꼭 땅콩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 땅콩이라기보다 땅콩 모음집인데 땅콩과 건포도, 기타 다른 견과류가 혼합된 믹스를 소포장한, '하루 견과'같은 제품이다. 왜 꼭 독일에서 사다 달라고 부탁하냐 하면, 이름이 'StudentenFutter' 라서 그렇다. 직역하면 '학생 먹이' 쯤이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학생모이'라고 부른다. Futter는 동물 먹이나 식량을 뜻하는데 마트에 가면 새 모이 Vogel Futter와 땅콩 Studentenfutter가 같은 가판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정원과 공원을 좋아하는 동네라 꼭 아무 나무에 아무나 걸어 놓을 수 있는 새 모이를 팔았다. 양파망 같은 성긴 망에 견과류와 씨앗이 담긴 모빌 형태의 새 모이가 초콜릿바나 젤리, 땅콩 같은 계산대 옆 스낵 코너에 같이 놓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처음 내 몫의 땅콩을 집어 계산하면서 비슷한 종류의 내용물이 하나는 익히지 않은 채로 망에 담겨 새모이Vogel Futter가 되고 익혀서 비닐봉지 안에 담긴 것은 학생용Studentenfutter이 된다는 점에 혼자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가끔씩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면 가장 조그마한 새 모이를 함께 사서 학교 앞의 정원 나무에 걸어 놓았다. 새가 새 모이를 먹는 것을 보며 같이 땅콩을 씹어먹고 있자면, 나도 모이를 먹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새는 아주 복스럽게 먹고 있었고 심지어 예뻤다. 또 어딜 가나 사랑받았기 때문에 포동포동해서, 모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면 괜히 낯선 곳에서도 챙김 받는 묘한 다정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학생모이는 브랜드와 가격에 따라 격차가 컸다. 학교 복도 자판기에 있는 게 가장 싸고 맛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나 수업 중간에 머리가 멍하면 학생들은 으레 자판기에서 초콜릿바나 학생모이, 팩에 든 싸구려 음료Durstlöscher를 뽑아 먹었다. 나는 아주 가끔을 제외하고는 늘 학생모이를 뽑아 먹었다. 초콜릿은 금방 녹아 사라지고 음료수도 몇 모금 마시면 바닥나는데 학생모이는 꽤 오랫동안 들고 다니면서 씹을 수 있어서 왠지 모르게 더 값어치를 하는 것 같았다. 자판기에서 파는 제일 저렴한 학생모이는 땅콩이 대부분에 가끔 아몬드 두어 개와 건포도를 드문드문 발견할 수 있었다. 소금 간을 한 땅콩은 유달리 작았는데 그럼에도 알알이 세어가면서 씹으면 은근히 배가 불렀다. 입안에 짠맛이 돌고 제대로 씹는 저작운동까지 하니 초콜릿이나 음료보다 훨씬 제대로 된 식이활동을 했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좀 더 비싼 학생모이들은 땅콩 외에도 아몬드, 헤이즐넛, 캐슈너트, 브라질넛 등이 몇 개씩 들어 있기도 하고 말린 살구와 해바라기씨가 들어있기도 했다. 물론 계급이 높은 견과류들은 콧대가 높았고 한 봉지에 최대 4유로 99센트나 하던 세련된 포장의 학생모이도 있었다. 한 번도 사 먹지 못한 그 학생모이는 왠지 학생모이가 아니라 교수모이나, 혹은 선생모이같이 느껴져서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부르주아의 모이는 자판기나 학교 근처에서 팔지도 않았다. 지금은 사 먹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역시 땅콩이다. 나는 그런 부르주아 학생모이가 아니라 꼭 제일 싼, 땅콩이 거의 대부분인 진짜 학생모이를 부탁한다. 땅,콩. 발음만 해도 좋고 모이처럼 먹으면 더 기분이 좋다. 땅콩 버터나 캐러멜, 쿠키도 모두 좋지만 결국, 중요한 건 땅, 과 콩, 의 총총한 맛이다. 콩은 싫어해도 땅콩은 좋아하는 사람은 많고, 작고 만만한데 만만치 않는 둥근 발음. 무적의 땅, 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