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과 멋 | 차가운 맛, 시원한 멋

차가운 요리의 맛 - 콩국수

by Ggockdo

여름의 주방은 또 다른 계절이다. 여름을 뛰어넘고 사막이나 동남아시아의 열대지역도 넘어선다. 물과 불에 벼려지는 온갖 것들의 난투극이다. 여름 주방의 불은 너무 혹독해서 이것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끼니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불을 당겨야 하는 여름의 프로메테우스는 괴롭다.

복날이나 조금 선선한 저녁이 아니면 최대한 간단한 불로 만들어지는 맛이 역시 여름에는 알맞다. 차가운 맛, 시원한 맛이어야 한다.


여름의 차가운 맛이라고 하면, 차게 우려낸 오미자에 수박이나 복숭아를 송송 썰어 넣은 화채가 먼저 떠오른다. 기력을 잃은 입맛에 새콤달콤한 게 역시 최우선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수박을 그다지 잘 먹지 않았다. 수박만이 아니라 참외와 같은 외과의 차가운 성질이 위장이 약한 나에게 늘 배탈을 선물했던 것이다. 한여름에도 배꼽 위에 이불을 돌돌 말아 얹고 자는. 아랫배가 차가운 나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더워도 수박이나 참외의 시원한 맛에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더운 여름에 비지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게 되어버린다.


외할아버지는 음식의 음양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뭐든지 더하는 것과 빼는 것을 적절히 맞추고 음과 양, 정과 반의 합이 잘 어우러져야 사람의 몸이 건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것은 맛을 뛰어넘은 음식의 멋이었다. 멋이 지켜지는 맛이 주는 기운을 받아 먹으라고 했다.

이를테면 차가운 콩으로 만든 두부와 따뜻한 성질의 간장을 꼭 같이 먹으라던 것이나, 두부를 따로 불로 달구거나 찌지 않으면 간장양념에 참깨까지 꼭 곁들여 먹게 하거나, 차가운 오이는 맵고 뜨거운 고추가루나 고추장과 중화시켜주는 식초까지 넣은 무침요리로 내어 놓았다. 마냥 여름은 뜨거우니까, 여름의 몸은 차가운 게 필요하니까 얼음 동동 띄운 냉면 육수에 차가운 메밀면만 말아 먹으면 안된다고 후식으로 따뜻한 계피로 만든 수정과를 마시게 했다. 잣과 배는 꼭 수삼과 곁들이고 메밀면은 열무와 고추장과 비벼먹었다.

차가운 맛에 따뜻한 멋으로 균형을 맞춘 여름요리들은 순하게 몸에 돌아서 땀으로 다 쏟아내는 기력을 알게 모르게 보충해 주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차가운 요리들은 꼭 그랬다.


덕분에 차가운 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운 맛과 시원한 멋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 시원한 멋은 재료의 성격이나 요리 방법까지 존중하는 에의바른 정중한 태도에서 나온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예의까지 차려가며 먹어야 하느냐고 생각하다가도, 밥상머리에 공손하게 구는 것 만큼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숙명을 멋있고 맛있게 짊어지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차가운 맛과 시원한 멋의 예의범절은 면요리에서 배웠다. 뜨끈하게 올려야 하는 쌀밥 식탁보다는 역시 빨리 뜨거운 물에 삶아 빨리 후루룩 넘길 수 있고 곁들이는 찬거리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면요리가 여름 주방을 최대한 자제시키는 일이다.

늘 시장 주변에서 살았던 운이 좋은 나는 면요리가 탄생하는 과정을 잘 알았다. 시장마다 국시가게에 여름철 한정메뉴인 콩국수나 냉면이 출시되기 시작하면 여름이 시작되는 게 당연하다. 우리 시장에는 면만 만드는 가게와 맷돌에 콩을 갈아 파는 콩국물가게가 따로 있다. 여름이 슬슬 다가오면 면가게는 길게 뽑은 소면과 냉면을 나무 걸이에 널어 말린다. 밀가루 냄새가 풀풀나는 가게 입구부터 가게 안쪽까지 머리카락처럼 늘어져 있는 소면의 면발들은 선풍기 바람에 한들 한들 흔들려 묘하게 마음이 간질거린다. 냇가의 수양버들이나 버드나무 잎이 시원하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한 소면이 느리게 흔들거리며 천천히 마르는 광경은 희어서 시원하고 후루룩 삶아 젓가락에 돌돌 말릴 미래에 드려진 여름 국수의 발(가리개)이다.

면발을 한 손으로 거두어 모아쥐고 꼭 동그랗게 종이에 굴려 단단하게 묶어 놓으면 대나무 목침 베개같이 둥그런 것들이 매대에 쌓인다. 녹차나 포도, 치자로 향과 맛을 낸 색색의 소면도 들쭉날쭉 들어가 있다. 나는 우리 시장의 이 면가게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이 있다. 수도권 도시의 시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제면 가게의 광경은 우리동네에 놀러 온 친구라면 꼭 데려가 보여줘야 하는 나만의 관광지같은 것이었다. 친구가 근처로 이사와 밥해주러 갈 때도, 여름에 출산한 친구에게 보내는 택배에도 꼭 갓 뽑아 말린 면을 동행시켰다.


면만 산다고 국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등이 많이 굽은 할머니와 아들 내외가 운영하는 콩국집에서 콩국물을 사야만 한다. 십수년째 다른 계절엔 족발을 삶아 팔다가 여름쯤이 오면 비닐 띄워둔 맷돌을 닦고 버젓이 가장 앞에 드러내는 위용은 여름 시장의 랜드마크다. 가장 큰 중앙통로에 자리한 오래된 맷돌이 콩을 서걱서걱 가는 소리는 아무리 목청 좋게 외치는 장사꾼의 소리와 시끄러운 호객 소리에도 파묻히지 않는다. 할머니는 빠르지도 않게 맷돌로 하루 종일 콩을 갈아내고 이따금씩 아들이 대신 맷돌을 잡았다. 이상하게도 힘이 훨씬 더 적은 할머니가 갈아낸 콩국이 더 오래가고 고왔다. 힘 좋은 아들의 맷돌 리듬과 할머니의 리듬이 만드는 콩국의 차이는 꽤 커서 사람들은 할머니가 맷돌 옆에 있을 때를 기다려 콩국을 사곤 한다.


삼천원에 한 봉다리하는 콩국은 담길 때에는 몇 국자되지 않아 양이 적어 보인다. 포장하지 않고 먹고 간다고 하면 되직한 콩국 한 국자에 우무를 숭덩 떨어 넣고 한 접시를 내어준다. 아저씨들은 간간한 얼음과 소금간이 된 콩국에 우무를 말은 한 그릇을 거리에서 선 채로 막걸리 사발 마시듯 순식간에 먹고 가버린다. 나는 까맣게 탄 짭자름한 얼굴이 흰 콩국을 들이키고 순순해져 돌아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순서를 기다렸다. 콩국은 겸허한 자세로 사람을 순순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맛이 대단치도 않은데 조약돌같은 얼음 몇 조각과 소금 한 꼬집이 들어간 콩국을 들이키면 번들거리던 아저씨들이 고분고분해졌다. 어쩌면 어떤 아저씨가 와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등이 한참이나 굽은 할머니가 천천히 먹어, 하고 건네는 게 좋아서 일지도 모른다. 콩국은 세련되고 멋드러진 레스토랑에서 멀끔한 종업원의 서빙으로 받아드는 음식이기보단 불린 콩을 조금씩 넣어 돌을 굴려 내려주는 따뜻한 손길과 음양의 조화가 맞았다.


고작 두 세 국자 넣은 콩국 봉다리는 꼭 신문지에 돌돌 말아준다. 다른 집들은 패트병에 담아 얼음과 함께 진열해 놓거나 냉장고에서 꺼내주지만 맷돌에서 갈려 나온 것은 꼭 그 자리에서 두 국자 뜬 봉다리와 신문지로 포장되었다. 신기하게도 신문지로 돌돌 말아준 콩국은 다음날까지 쉬지 않았다. 양이 적어보여서 한 봉지 더 사야하나, 망설일 수도 없다. 젋은 사람도 할머니들도 느리게 갈려 나오는 맷돌의 콩국을 기다리고 있어서 눈치껏 빠져줘야 한다. 그래도 괜찮다. 작아 보이는 한 봉다리는 막상 면에 붓기 시작하면 세 그릇은 너끈히 나왔다. 딱히 물을 타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많은 양이 불려 나왔다.

완성된 한 그릇의 콩국수 먹기는 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집에서 국수를 삷고 찬 물에 면을 헹구고, 오이 조금 썰어 고명으로 깨와 올려 콩국을 부어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국수 면이 만들어지는 것과 맷돌이 콩을 으깨는 것까지 다 둘러 보고나면 이 단순한 한 그릇의 면요리에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가 없다. 시원하고 차가운 요리가 완성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과정이 더 느리고 고분고분하게 깃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소면은 널어 말리는 긴 시간과 뜨거운 물에 화르륵 익는 짧고 뜨거운 시간을 품고 다시 차가운 맛으로 돌돌 말린다. 콩은 뜨거운 물에 파드득 익고 오랜시간 물에 잠겨 불려난 뒤 아주 천천히 돌사이에서 으깨져 나와 차가운 맛으로 풀어헤쳐 나온다. 콩국수의 시원한 멋은 느리게 조리되는 시간의 멋이고 흰 소면과 흰 콩국의 하염없이 흰 눈과같은 소복히 쌓이는 멋이다.


콩국수를 아무리 음미해도 콩국은 이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가고 소면도 목구멍을 쉽게 넘어간다. 느리게 예의를 갖춰와서 몸이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아도 금방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남은 오이 고명만 뽀드득거리며 이에 걸렸다. 참깨 몇 개가 마지막에 따뜻한 고소함을 남긴다. 선풍기 바람을 먹은 것처럼 희고 슴슴한 맛이 멋있게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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