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2

귓불을 간지럽히던 바람의 속살거림

우리가 울진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었다. 죽변항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죽변', 뭔가 아득한 이름 같이 느껴졌다. 유래를 찾아보니 원래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 '죽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내가 살던 울진에는 말이야..." 하면서 눈을 깜박이며 어린 시절 울진 어촌마을 할머니 댁에서 살다가 마산으로 이사 왔다는 여고시절 반 아이의 맑은 눈망울이 다 떠올려졌다. 나는 당시에 '울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울산' 정도는 모를까 '울진'은 너무 까마득히 느껴졌었다. 다만 그 동급생,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렸는데 곱슬머리에 머루 빛깔 같던 친구의 까만 눈망울이 생각나는 걸 보면, 아마도 그 친구는 울진을 아주 아끼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반짝이던 눈동자처럼 울진의 밤은 이미 어두웠으나, 나의 마음은 등불이 켜진 듯 환한 기분이었다.


30년 만에 재회한 L과 나는 아주 특별한 연인이 되어 숙소에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사방은 어두워져서 해변이 다 보이지는 않았다. 요기를 해야 하는데 식당조차도 몇 군데 없는 듯, 해변가로 불빛이 군데군데 있었다. 선착장과 어판장 등등에도 이미 하루를 갈무리한 느낌이었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더 좋은 곳이 있나 둘러보려고도 했지만, 이미 문을 닫은 곳만 속속 보였기에...


우리가 들어간 식당에도 손님이 거의 빠지고 본관에 한 두 테이블, 옆에 별관처럼 포장마차처럼 꾸며놓은 곳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몇 시까지 하나요?"

"충분히 드시고 가세요, 거의 막손님 같은데요?"

우리는 막 자리를 뜨는 한 테이블을 빼고 별관에서는 마지막 손님인 듯했다.

L이 물회 한 그릇 씩이랑 매운탕을 시켰다.

아직 초봄의 날씨가 스산했는데 물회라니...

"벌써?"

"이런 데는 아마 좋은 놈으로 줄 거다."

과연, 무슨 수종인지는 모르겠는데 입에 씹히는 식감이 쫄깃한, 싱싱한 물고기가 입안에 가득해졌다.

물회를 먹는 둥 마는 둥 매운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매운탕에 쐬주 한 잔. 소주가 달았다.

L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장님이 오셨다.

말을 시키셔서 우리는 부산에서 왔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사는 곳은 서울이지만...

나는 대뜸 "우리 스무 살 때 친구예요. 지금 몇십 년 만에 이곳에 함께 왔네요."라며

흥분된 어조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세요? 젊어 보이시는 데 몇십 년 만에 보다니요?"

L과 나는 마주 보고 웃었다.

사장님은 들어가신다고 했다. 외국인인 서빙하는 아가씨가 있으니, 술을 더 마실 거면 알아서 마시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이미 계산을 했기에 더 필요하면 그러겠다고했다.

그리고, 술은 더 이상 마시지 않고, 소주 한 병만 딱 비운채 우리 둘은 식당을 빠져나왔다.


숙소 앞까지 아주 가까웠기에 나는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는데 L은 감기 든다며 말렸다.

어디 근사한 커피숍이 있다면 등대를 보거나 밤바다를 쳐다보며 차 한 잔 하고도 싶었으나 이미 시간이 꽤 되었다.

숙소에서 맥주나 한 잔 하자고 L이 말했다.

"아, 아까 사둔 맥주랑, 커피가 있었지..."

그리고 L은 차 트렁크로 가서 뭔가를 한 아름 가지고 왔다.

"너한테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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