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때부터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L. 베토벤이었나 모차르트였나, 이런저런 생각할 게 많아 새겨듣지 못했는데 분위기로만 느꼈다.
바야흐로 봄이고, 밤이고, 바다다. 그리고, 30년 만에 만난 너랑 내가 여기 오다니.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친구와는 서울에서 30년 만에 본 게 보름 전이었고, 두 번째 만남이었다. 두 번째 만남은 부산에서 만나 바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던 것.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아, 참 이거 봐라, 신발도 신어보고..." L이 커다란 쇼핑백을 가져온다.
L은 아울렛에서 스포츠 매장을 하고 있는데 나한테 줄 운동화와, 츄리닝, 점퍼, 배낭과 양말까지
챙겨 왔다. "1박 2일 여행할 때 무거운 거 들지 말고, 이 배낭이 딱이다. 많이 걷는 너한텐 이 운동화가
편할 거고." L이 내 민 것들은 한 보따리였다. 나는 유난히 발이 작은데 이렇게 딱 맞는 운동화도 처음이었다. "야, 발치수 물어보길래 한 켤레는 주겠지 했는데 이게 다 뭐야? 살림 거덜낼 일 있냐?"라고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놀라서 물었다.
"너 만난 게 너무 좋고, 기뻐서 매장, 창고 다 훑어서 너 줄만한 거 골라왔다."
당황스러웠다. 허니문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공주가 된 것도 같고 마치 신혼여행을 떠나온 거 같기도 했다.
맥주 한 캔씩 하고, L이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잠이 안 왔다.
파도소리와 TV에서 나오는 클래식 선율과 나의 온갖 상념들이 범벅이 되어 잠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뒤척이다가 사방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일출... 두둥실 태양이 "안녕?"하고 떠올랐다.
색다른 기분의 일출이었다. 계절은 봄이고, 뭔가 꿈꾸는 도시를 찾아온 듯했다. 한편으론 불안했다. 아니, 몽롱하다고 해야 하나? 스무 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우리가 각자 살아온, 서로에게는 잊혔던 30년이 무색했다.
동해의 태양은 티 없이 맑았다. 맑음 자체의 맑음... 파도와 햇살이 서로 부딪혀가며 포옹하는 듯했다. 마치 그 소용돌이 안에 L과 내가 떠밀려와서 안겨져 있는 듯도 했다.
거칠지 않고 다정한 바다 한가운데 하얀 포밀과 반짝이는 햇살의 속살거림,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꿈꾸는 듯 몽롱한 기분으로 커피 한 잔 하고 있는데 L 이 일어났다.
"안 깨우고 혼자만 보고 있냐?"
늦게 일어나 억울하다는 듯 볼멘소리로 말하더니 "야, 진짜 멋지다.. 동해는 동해다, 역시 바다다.."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렌지, 바나나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죽변항으로 나왔다. 정오의 죽변항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이 부셨다. "점심은 곰치국이다." L과 나는 제일 유명하다는 곰치국 집을 찾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방에 자리를 잡았더니 가족 한 팀과 동료들로 보이는 한 팀이 더 들어왔다. 벌써 낮에는 더워서 선풍기에다, 나중에는 에어컨까지 틀어주었다. "곰치국이 뭔지 아나?" "글쎄. 메기탕 같은 거?" "오! 비슷하다."
간단한 반찬과 곰치국이 나왔다. 부산에서 엄마가 끓여주는 물메기탕과 비슷했다. 그런데 이 가게의 특징은 김칫국. 김치를 넣어 새콤하면서 부드러운 맛이었다. 부산이 고향인 L과 나에게는 생소한 맛이었다. "김치 넣고 끓이는 건 처음 보네..." 심심하지만 괜찮았다. 물컹한 느낌이 입안 가득 뱅뱅 돈다. "든든하게 먹어둬라. 드라이브 좀 더하고 가면 너나 나나 밤일 테니...
" 울진도, 죽변항도, 곰치국도, L과 나의 여행도... 모든 게 처음이었지만 불편함보다는 그저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우리 둘 사이에 사랑스러움과 황홀함만이 뿜뿜 했다 우리는 또 달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