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 사거리 / 신기섭
고(故) 신기섭 후배와 나의 외갓집
by 꿈꾸는 리얼리스트 Dec 26. 2019
□ 읍내 사거리 / 신기섭
읍내 사거리에 가면 중앙약국이 있다
우리 동네 영란이 누나가
약사 보조로 일하고 있다
거미줄같이 침착한 주름의 약사,
언제나 내가 다른 병을 얻어 들르는 날에도;
변비는 어때요? 꼭 묻곤 한다
읍내 사거리에 가면 문방구 '종이나라'가 있다
초등학교 때 물체 주머니 훔치다 잡힌 경력 탓에;
호적에 시뻘건 줄 죽죽 그어지면
빨갱이처럼 인생 조지는 거라!
할머니 말씀, 아직까지 듣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주 인생을 조지진 않았지만.
읍내 사거리에 가면 담배 파는 신발가게가 있다
고등학교들도 담배를 산다
그곳에서 신발을 사는 이들은
노인들뿐 청년들은 담배만 산다
청년들은 그곳을 담배가게라고 부른다
한 번 그곳에서 신발을 사 신은 나는
동창들에게 늙은이 취급을 당했다
읍내 사거리에 가면 왕순댓집이 있다
장날마다 극장처럼 사람들은 줄을 서고
검은 봉지 속에 한가득
순대를 돌무덤같이 담아간다
오래 기다린 입덧처럼 봉지가
불끈불끈 흰 김을 토해낸다
읍내 사거리에 가면 꽃집이 있다
그 위층에는 신치과가 있다
꽃냄새와 약 냄새처럼
그 치과 간호사와 나, 연애를 했다......
꽃집에서 장미 한 송이씩 늘 사서
계단에다 놓아두곤 했다 어느 날,
장미를 짓밟고 그녀는 퇴근을 했다
읍내 사거리에 가면 다방이 두 개 있다
산유화 다방과 개미 다방
산유화는 늙은 레지들이 많고
개미는 어린 레지들이 많다
산유화 레지들은 밤마다 술집을 돌고
개미 레지들은 밤마다 여관으로 간다
읍내 사거리에 가면 나에게 침 뱉는 법과
좆춤 추는 법을 가르친 선배들이 있고
장날마다 땅바닥에 뒹구는 몇 알의 튀밥이 있다
어린아이들도 누구나 다 침을 뱉고
여자아이들은 여관처럼 잘 더러워진다
한번 이 읍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은
겨울잠을 자고 온 곰처럼 온순하지만
금세 다시 사나움을 되찾고 만다
그리고, 다시는 떠나지 않는다
읍내 사거리에 가면
아무것도 없다
ㄴ
◇ 내게도 '읍내 사거리'가 있다.
경남 고성군 성내동 1번지. 일흥 양복점.
울외 가집이다. 외갓집 앞에는 장날이면 '딸랑 가락국수'포장마차와 냉차를 팔던 아저씨가 계셨고 길 건너편에는 초등 동창 영호네 '동아 상회'가 있었다.
그 앞 주차장 2층에는 '목마 다방'이 있었는데 외할아버지 따라가서 먹었던, 달걀노른자 얹어주는 쌍화탕과 모닝커피의 추억이.
그 옆엔 서로 다른 학교 다녔지만 오며 가며 보석을 구경할 수 있었던 고향 친구네 백금당이, 백금당 대각선 건너편으론 친구 복희네 '꽃신 집', 그 옆으론 이모 후배네 '박순봉 문방구'가...
저마다의 추억 속 공간에는 수없이 많은 얘깃거리와 웃음과 눈물, 그리움이 있다. 외갓집 옆집 살던 금성사 창호네는 창호 아버지가 역술인 되었다고도 하고,
막내 외삼촌 따라 부산 우리 집까지 놀러 오던 창호는 외갓집에 가면 소꿉놀이하던 친구였는데 이후 내가 외갓집으로 이사 갈 무렵, 마산으로 이사 갔다가 나중엔 서울로 갔다고 하고...
지금도 만나는 고향 사람들과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하늘나라로 떠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별 이야기까지...
또 다른 얘기가 쌓여가고, 묻어지고, 번져가고, 묻어나고...
세상은 돌고 돌아 맞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