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생 ver 2

자기소개서

by ggom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가장 딴짓이 재밌다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요 근래 글이 잘 적히지 않아서 약간 울적한 기분이었는데 기어코 브런치에 접속게 하는 자기소개서는 도대체 무슨 존재인지.


자기소개서의 고됨은 하나의 이유가 아니다. n천 자 남짓의 분량이며, 정답이 명확한 질문들이며, 그밖에 자유롭게 본인을 소개하라는 배려 아닌 배려까지. 그렇지만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자기소개서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사실에 기반한 거짓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는 대학 때 모 수업을 들었다. 수업 때 배우고 느낀 게 단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많은 수업이 그렇듯 전공이라서, 다른 사람들도 들으니까, 따위의 이유로 들었다. 담백하게 사실만 적자면 "저는 대학 때 모 수업을 들었습니다."라고만 적으면 된다. 군더더기가 없어서 깔끔해보인다면 감사하다. 하지만 그 깔끔함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사실 정말로 그런 것이다. 수업을 온갖 감정을 실어서 듣는 사람이 많겠느냐는 말이다.


반대로 완전 거짓으로 써보자. 이때는 어렵거나 멋있어 보이는 수업을 아무거나 적으면 된다. "저는 대학 때 모모 수업을 들었습니다." 들은 적 없는데 들었다고 적었으니 거짓말이다. 수준 높은 수업이라면 인정해줄 법하다.


그런데 자기소개서는 완전 사실도, 완전 거짓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기로는 사실만 요구하겠지만 그렇게 적어서 통과한 사람이 있다면 알려달라.) 사실을 적당히 다듬어 조그만 옥석으로 만든 뒤 당신이 빚은 감정과 깨달음의 조각상에 박아두라고 한다. 정상적인 조소라면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덧대는 식으로 완성하겠으나, 자기소개서는 그 반대다. 살아오면서 저지른 쓸데없는 일들을 뼈대로 삼았다간 흉측한 작품이 되고 만다. 자기소개서에 담을 스토리를 먼저 구상하고 그에 맞춰 내 사실들을 끼워넣는 반직관을 행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기소개서는 완전 사실도 완전 거짓도 아닌 중첩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저는 대학 때 모 수업을 들으며, 모모를 깨달았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전자는 사실이고 후자는 대개 거짓이다. 이 문장의 오묘함은 무슨 경험을 통해 무슨 깨달음을 얻었다는 시간 흐름과는 달리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경험을 재구성하는 역전에서 비롯된다. 인생은 무작위 방향들의 연속인데 그 중 자기소개서가 바라는 벡터들만 뽑아 놓았으니 얼마나 엉성한가. 그러다 그 반대 벡터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어느 조직이든 사람을 뽑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안다. 자기소개서와 잇따르는 면접이 크게 비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아니다. 여느 시험처럼 자기소개서가 사람의 파편만을 겨우 평가할 뿐이고, 숱한 평가의 시대에도 온전하게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던 아쉬움이 클 뿐이다. 애당초 "사람"과 "평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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