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은 것에 삶의 책임이 미칠까? 예컨대 신당역은 6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방향으로 갈 때 환승통로 끝에서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야 하는데, 계단 위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이는 경우 - 즉, 열차가 막 도착한 경우 - 당장 뛰면 1-1 출입구라도 탑승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올라오는 게 보이는 순간 전속력으로 뛰어야 한다. 누가 올라오더라도 보지 못하는 경우나 전속력으로 뛸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에게 열차 탑승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해태함은 과연 나의 책임일까?
이를 긍정하는 입장은 삶의 모든 가능 집합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선택할 수 있었는데 선택하지 않은 모든 선택지에 대하여 - 그러한 선택지가 다수라면 그 중 가장 가치가 큰 선택지에 대하여 -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선택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선택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즉, 선택하지 않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선택의 한 양태이므로, 선택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면 선택하지 않는 것에도 책임이 있어야 한다. 환승통로에서 늦은 뜀박질 또는 뜀박질의 포기로 환승을 늦게 하였다면 이에 대해서도 나는 내 삶에 책임이 있다.
반대로 이를 부정하는 입장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고 한다. 어느 순간의 가능 집합은 나의 선택 행위로 붕괴되고 실제 선택지 하나로 수렴하여, 다른 가능했던 선택지들은 그 책임을 물을 대상 자체가 없다. 또한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선택은 본질적으로 검토 과정을 수반한다.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이 동일하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모든 선택지를 동등하게 검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정도로 합리적인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 고작 몇 가지 선택지를 검토할 뿐인 우리의 직관으로 우연히 포기된 대다수의 선택지를 선택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열차 탑승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한 상황에서 탑승하지 않겠다고 충분히 검토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
부정설의 입장은 결국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검토' 유무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단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인식'보다 엄격한 개념이다. 여기서의 '검토'는 선택한 선택지와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동등한 수준의 숙고를 의미한다. 예컨대 선택한 선택지에 대하여 비용, 편익 등을 기준으로 검토하였다면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해서도 비용, 편익 등 동일한 기준으로 검토하였어야 한다. 이렇게 검토하였다면 양자는 동일한 검토를 거쳤으므로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반면, 서로 다른 수준으로 검토하였다면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를 진정으로 검토하였다고 보기 어려워 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반면 '인식'은 단지 여러 선택지들이 나열되어 있는 상황 자체에 대한 인지를 뜻한다. 논리적으로 선택지들이 인식이 되어야만 그제서야 검토가 가능하므로, 단지 어떤 선택지가 인식되었다는 이유로 검토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신당역 환승통로에서 누군가 계단에서 올라오는 모습을 인식하였다는 것만으로는 뛰어서 열차에 탑승한다는 선택지와 이번 열차는 탑승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동등하게 검토하였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며 여러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상황 자체를 간과하기 일쑤이며, 설령 이를 인식하더라도 모든 선택지에 대해 깊게 고민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특히 선택하지 않는 선택지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온전한 책임을 지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주의적인 발상이 후회를 거세함으로써 삶을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들지는 모르겠으나, 오직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이유로 책임을 덜 수 있는 가볍고 건조한 선택지들만 고르게 될 위험성이 크다. 무겁고 축축한 일들을 모조리 피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일지는 깊은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