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사봉공’이냐? ‘활사개공’이냐?

꼼꼼한 잡담 2 |

by 꼼꼼

‘멸사봉공(滅私奉公)’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을 버리고, 공익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뜻.

‘활사개공’(活私改公)’

사사로움을 살려 공적 영역을 열어간다는 뜻.


이 둘은 사회와 조직에서 자주 사용되는 사자성어다.

자주 사용된다는 의미는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가치다.


개인의 이익과 감정을 희생시켜 공동체를 위한 일에 헌신을 강조하든지

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소거시키지 않고, 그것을 공동체 안에 꾸준히 반영하든지 말이다.


너와 내가 있는 공동체, 회사, 조직은 어떠한가?

자신의 감정을 쳐내고 깎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는 것을 우선하는가?

아니면,

억눌러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기에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을 우선하는가?


돌이켜보면,

멸사봉공의 가치가 서로를 고립시키고 단절시켜 온 것은 아닌지 모른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 아래에 숨겨진 내면을 꾹 눌러 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활사개공을 가르친 적도 배운 적도 없어서 어설픈 활사개공으로 전체를 흐트러 버리는 것에만 몰두한 것은 아닌지.


당신은 어떠한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활사개공의 삶을 살 것이라 말할 것이다.


서로의 ‘다름’이 서로에게 ‘닿음’이 되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면서 말이다.

사사로움과 공공성은 서로의 극단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움은 공공성의 토대 위에서 발현되고, 공공성은 사사로움으로 진실해진다는 것을 여전히 믿는다.

정직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공공성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정직한 나’라는 것은

너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기대어 사는 것.

그것이 곧 공공성으로 가는 길일게다.


활사개공의 공동체를 꿈꾼다.

존재의 억압과 휘발이 가져다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존재의 발견이 어우러지는 공동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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