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을 걸었다

떠오른 몇 개의 단상

by 초린혜원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원피스를 꺼냈다. 너무 하늘하늘거려서 최근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원피스다. 입은 자태를 보고는 그리스 신화 속, 무명의 어느 여신 같다는 칭찬도 아닌 그렇다고 놀림만도 아닌 얘기를 듣게 만든 원피스 기도 했다. 멋진 옷은 좀 더 멋진 곳으로 길을 인도하리라는 희망을 품어도 될 만큼.


나이 들어가는 몸과 얼굴 사이 옷만 너무 튀는가 싶었지만, 마스크로 얼굴 3분의 2쯤을 가리고 나니 눈빛만 20대를 가장한 여인이 남아, 그럭저럭 입성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늘은 스스로에게 잠깐의 일탈을 허락하기로 한다.



-보자, 한낮 최고 기온이 23도까지 오른다면 이 위에 겉옷을 걸치지 않아도 충분하겠고, 가벼운 워킹화를 신고 따로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길을 나선다. 그새 500원이 올라버렸지만 그 어떤 밥상에 견주어도 부럽지 않을 7천 원짜리 순두부 정식을 점심으로 챙겨 먹고는, 꽃잎을 반쯤 잃어버린 벚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말을 걸어주는 이 하나 없고 동반자는 그저 새침하게 약이 오른 봄바람뿐. 그마저도 불었다 그쳤다를 반복하니 덩달아 마음이 오락가락이다.


-제 멋대로인 봄바람에 보폭을 맞추느라 한껏 느려진 발걸음, 내딛는 발등 위로 벚꽃잎이 하나, 둘 내려앉는다. 벚꽃이 지니, 봄조차 다~ 지는 거 같다. 여전히 꽃 필 차례는 줄지어 기다리고 있건만, 이 여린 꽃잎이 폭풍처럼 지고 있으니 시절을 통째 도둑맞은 느낌마저 든다. 계절이 이토록 한꺼번에 여위어간다는 것도 슬픈 일이고.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오후, 햇살은 어쩌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정염의 옷을 갈아입으며 유혹하는지. 비통과 농염의 극명한 대비가 맞물려 잠시 휘청, 한다.


봄날의 산책 길엔, 모든 것이 선명히 다가온다


-봄볕 아래 모든 이들은 이 치명적 유혹에 젖어,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달아나고 있는지 자주 잊어버린다. 끝 간 데 없이 달뜨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공원 정자에 모여 한담을 나누는 노인들의 목소리가 햇살을 입더니 전에 없이 선명하고 당당하게 울려 퍼지는 거 같기도 하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투영된 모든 것이 시나브로 짙어진다. 사물의 색, 상념, 시간의 그림자까지.


-발끝에 걸린 오후 4시의 그림자는 마스크 안에 감춰진 움푹 파인 세월을 들춰내며, 또 한 번 마음을 어지럽히지만 눈길은 가로수 아래 난전, 연둣빛 봄나물에 머문다. 난전의 주인은 한가로이 졸고 있는 듯 보이는데, 내겐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이 봄이 그에겐 어쩌자고 느린 박자로 춤을 추며 머무는 것인가, 선택적으로 젖어드는 봄의 속성이 야속하고 밉다.

-어제 반갑게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오늘 벌써 갈 채비를 서두르는 게 봄이다. 하여, 봄은 어쩌면 '온다', 보다는 '간다'에 더 어울리는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봄꽃을 향한 봄볕의 순애보가 열렬하게 기록된 하루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앉을자리까지 따라 들어온 그림자에 연분홍빛 꽃물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내년 봄까지 지워지지 않을 지독한 그리움의 꽃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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