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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Jul 16. 2021

7번 버스정류장의 우동은 맛있었다

엄마와 비와 우동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올해는 왠지 비가 잦은 거 같아서 안심이다. 이즈음의 비는 농사를 짓는 분들에겐 꼭 필요한 약비라고 하니 괜히 혼자 마음이 흐뭇해져 내리는 비를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맞아 보기로 한다. 오랜만에 몸으로 잔잔히 스며드는 보슬비를 맞고 있자니 전에 없던 허기가 밀려와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날씨 덕에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가 꽤 아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막걸리 한잔에 김치전을 후딱 지져내서 먹는 것도 참~ 좋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비가 내리거나 비를 동반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우동이 그렇게 생각나곤 한다. 이마저도 까마득한 옛 추억이기는 하나, 한동안 '비 오시면 우동'이라는 어떤 불변의 공식으로 내 기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왜일까?



내 고향은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곳이다. 예전 사회책을 뒤져보자면 전형적인 '과우지역'으로 소개될 만큼 비는 물론이고 낭만을 꿈꾸는 자들의 로망인 눈도 아주 인색한 곳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비나 눈이 자주 오지 않는 탓에, 돌이켜보면 비나 눈에 관련된 재미있는 기억, 아련한 추억들이 제법 많고 잘 잊어지지가 않아 고맙기도 하다. 비 내리는 날엔 우동이라는 희한한 공식이 생겨난 것도 어쩌면 이런 기억의 법칙이 내게도 적용됐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 그저 시를 쓰고,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의 틈, 그 무한한 가능성의 개척지를 몽땅 매우곤 하던 소녀였다. 수학 시간에도 계간지인 '창작과 비평'을 공공연히 펼쳐 놓고 읽는가 하면, 야간자습시간이면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시 창작에 골몰하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보며 절친했던 친구이자 전교 1, 2등을 다투던 친구는 가끔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었지만 뭐, 여하튼. 시는 당시 내 생명을 이어주는 불꽃이었고, 단 하나의 연인이었다. 목표이자 과정이며 다다를 어떤 곳이었다. 그래서 시를 읽거나 쓸 때면 주변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야간자습 시간이면 친구들은 참고서의 문제를 열심히 풀다 지치곤 했지만, 난 멋들어진 시어를 건져 올리지 못한 자책감과 알 수 없는 허기에 시달리곤 했다. 저 내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닮은 허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근원적 허기에 교문을 나설 무렵이면 자주 허리가 꺾이곤 했다.



지금은 이 도시 최고의 명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나와 내 동기들이 1회 졸업생이었던 모교는, 앞산의 언덕바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체육시간이면 운동장을 달리는 대신, 운동장에 남아 있는 암석이나 돌들을 치우거나 주워야 했던 그 학교엔, 가닿는 버스도 그리 많지 않아서 학교를 다니는 게 일종의 모험 같은 나날들이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선 집에서 출발해 20여분쯤을 걸어가 7번 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나조차도 고3이 되니 이 오가는 길이 힘겹고 무거워지기 시작했던가 보다.


"엄마, 내 쫌 힘들다 요새. 고 3이라가 책가방에 책하고 참고서도 잔뜩이고, 야자(야간자습) 끝나고 버스에 내리가 집에 오는 길이 억수로 무섭다."


"맞나? 그라믄 우짜노, 엄마가 이제부터 데리러 가께"


그냥 슬쩍해본 말인데, 엄마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시는 거였다. 하루 종일 다리가 퉁퉁 붓도록 장사를 하시는 엄마의 수고를 모를 리 없지만, 고3의 위세로 슬쩍 던져본 말인데 엄마가 그리 반응하셔서 저으기 놀랐었다. 그날부터 엄마는 그야말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대봉동 7번 버스 정류장으로 나를 마중 나오시기 시작했다. 피곤이 잔뜩 서린 얼굴을 웃음으로 위장한 채, 희미한 가로등 아래 꾸뻑 꾸벅 졸다 버스의 급정거 소리에 소스라치듯 놀라 깨는 엄마를 발견할 때, 가슴이 자꾸 뻐근해지곤 했다.


"엄마. 피곤한데 안 나와도 된다. 내 괜히 해 본 소리다 아니가."


"아이다, 엄마도 밤바람 쐬고 디기 좋다."



그렇게 한,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막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갑자기 세찬 비가 퍼붓기 시작했고,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어쩌나.. 하고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리는 길이었다. 저 멀리서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커다란 우산 하나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온 엄마는 숨을 헐떡이며


"아이고 야이야. 비 안 맞았나? 엄마가 오늘 집에서 고마 살짝 졸아가... 쫌 늦었재? 니 배 안 고푸나? 맨날 야간자습 한다꼬 허기 진다매?  뜨끈한 우동 한 그릇 묵을래?"


'에, 우동? 우동이라면 자고로 엄마가 집에서 말아주는 것인데, 유부(엄마는 아부라기라고 불렀다)와 대파, 구운 을 얹은 그 우동 말인 건가?'


엄마는 예의 그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을 재촉하듯 옮기시더니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선술집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엄마 뒤를 따라 들어가니,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아지매요, 그 이쁘다는 큰딸인가배? 아따 진짜로 이뿌네. 아주무이 말 맹쿠로 오드리 햅번 닮았네. 우동 2그릇 말아주까?"


"아입니더. 한 그릇만 퍼뜩 말아 주이소. "


엄마가 내 자랑을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하고 다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오드리 헵번은커녕 짝퉁 오드리 햇반에 더 가까운 딸이지만, 엄마가 무뚝뚝한 성정을 지닌 말수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내겐 주인아주머니의 표현이 다소 신선한 충격이긴 했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바로 그 허름한 집의 우동 맛이었다.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 주던 우동의 육수와는 감칠맛이 확연히 다른 육수로부터 시작해, 고명으로 얹힌 유부와 어묵 한 조각, 잘게 썬 대파와 굵은 고춧가루의 완벽한 조화는 비에 젖은 몸을 일시에 녹여주기에 충분했었다. 엄마에게 한 번 먹어보라는 말하지 않은 채, 우동 한 그릇을 그렇게 게눈 감추듯 비워냈다.


"엄마, 이 집 우동 진짜 맛있다. 와 이래 맛있노!"



감탄사를 연발하며 우동 한 그릇을,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워낸 나를, 엄마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냥 쳐다보고만 계시는 것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라지만 아이가 고 3이 되면, 비타민이다, 소뼈 고은 물이다, 한약이다... 를 챙겨 먹이던 집들 제법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에 간식 하나 따로 먹이지 못하니, 그냥 삼시세끼 밥이라도 뜨시게 해주는 것이 소임이라 생각하셨을 거다  엄마는. 그런데 밖에서 사 먹인 값싼 우동을, 딸이 이렇게나 맛있게 먹으니 순간 어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엄마 속도 모르고 주인아주머니에게 우동국물을 어떻게 내느냐 묻고 있었던 열아홉의 나는 참 철이 없었었구나.


커다란 우산을 둘이 같이 쓰고 희미한 가로등 아래 가늘게 부서지는 비의 미뉴에트를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뜨끈한 우동 국물이 들어간 터라 나는 만 감에 젖어, 그날 읽었던 시의 한 구절을 엄마에게 들려주며 언젠가는 이런 날의 풍경을 멋들어지게 묘사하는 시인이 될 거라, 호언장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 3이 시라니! 하지만 엄마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내리는 비의 리듬을 따라 발을 맞추려는 듯, 자박자박 젖은 발자국 소리만 내실뿐이었다.


'여름 비와 엄마와 우동',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 내게 너무 큰 의미로 자리 잡혀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신기하게도 아이를 임신하고 초기 입덧에 시달릴 때였다. 아무것도 먹기가 싫어서 거의 굶다시피 하다가 친정엘 들렀는데, 동생이


 "언니야 뭐 먹고 싶은 거 없나? 먹고 싶은 걸 먹어야 예쁜 아를 낳는다 카던데" 하는 거였다.

순간 번뜩 떠오른 것이 바로 그 우동이었다. 엄마가 마중 나와서 사줬던 그 선술집의 우동. 아무렇게나 말은 것 같지만 묘한 감칠맛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우동, 그 우동을 간절하게 먹고 싶었다. 후루룩 한 그릇 먹고 나면 입덧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거 같았으니.


가난한 내 어머니가 쌈짓돈을 털어 사준 귀한 우동이어서 더 맛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또 어쩌면 비가 내리는 그날의 정경이 한몫을 더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단언컨대 그 우동보다 더 맛있는 우동을 생을 통털어 먹어본 적이 없다. 엄마는 그후에도 비가 오는 날, 몇 번 더 그 우동을 사주셨었고, 가끔은 그 우동집의 육수 맛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 몰래 고군분투하기도 하셨음을 안다.


요즘엔 밀가루 음식을 일부러 멀리 하고 있기 때문에 우동을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예외로 두는 시간이 있으니 이즈음, 여름 장마가 시작되는 시점일 것이다.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날의 짧은 장면을 잊을 수가 없기에 우산을 받혀 들고 시내 '미진 분식'으로 향한다. 진한 국물 맛이 그날의 우동맛과 가장 비슷해서이다.


우동 국물 한 숟가락 호기롭게 떠 들지만, 이내 엄마 생각에 목이 매인다.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우동을 먹는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에 담겨 있던 수만 마디의 말을, 그 말에 녹아 있던 감정을,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다 해석하기는 힘들다. 하나 우동국물이 따뜻했듯, 우리의 시간도 많이 따뜻했음을 내내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올해는 장마가 빨리 시작될 거라고 한다. 하여 내 추억에의 귀환도 예년보다 조금 빨라지지 않을까 싶다. 엄마를 좀 더 빨리, 자주, 만나러 가야겠다. 우동에 김밥 한 줄 꾸역꾸역 먹으며 어느새 그 시절의 엄마 나이가 돼 버린 딸이, 침침해진 눈으로도 항상 책을 읽고, 여전히 시를 사랑하고 있노라 자랑해야겠다.


*가락국수가 표준어이긴 하나, 어디든 메뉴판에 우동이라 적혀있기도 하고, 나의 시간에 자리하고 있는 건 바로 우동이기에 우동으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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