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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Apr 29. 2022

비빔밥과 정장 두 벌

눈물과 고마움이 뒤범벅됐던

매년 4월 말에서 5월로 접어드는 이 무렵이면 조용히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차오르는 풍경 하나가 있다. 그 풍경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몹시도 따듯하고 상냥하면서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아른하다. 굳이 봄이어서 혹은, 봄의 한가운데에서 내일의 희망을 위해 어떤 채비를 하는 순간 이어서만은 아니다. 그 풍경에 나란히 자리한 엄마와 내 모습이 우리의 모든 순간을 통 털어 가장 기억에 아로 새겨진  한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작은 대학 4학년 첫 학기 중간고사를 마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혜원아, 니 교생 실습 언제 간다 캤노? 고마 다 됐다 아이가?"


"어, 엄마 다 돼가네? 근데 그건 와(왜)?"


"아이고 야는 와는 와고, 자고로 교생실습이라카는 거는 선생님이 될라꼬 실습을 한다는 긴데, 옷도 좀 갖춰 입고 가고 그래야지. 니 옷이라 캐봤자.. 청바지밖에 더 있나!"


엄마 말대로 교생실습을 목하 앞둔 나였지만, 그런 것까지 엄마가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성적 순대로 교원 자격증을 부여받아 실습을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직이수를 하고 실습을 하는 것을 그냥 대학생활의 한 과정으로만 여겨서 그렇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옷이야 뭐 있는 대로 입고 가면 되겠는데, 집에서 적지않이 먼데 자리하고 있는 실습학교를 오가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큰 걱정거리였으니까.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않게 실습에 입고 갈 옷 이야기를 엄마가 꺼낸 것이다. 마당 앞 목련이 그 눈물 같은 잎을 뚝, 뚝 떨구던 봄날의 하루에 말이다.



나중에야 엄마가 이토록 나의 교생실습에 신경을 썼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엄마가 실은 교직의 경험이 있었던 분이었기에 '교단에 선다는 엄중함'을, 그 고귀함을, 당신의 딸이 입는 것부터 챙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하던 공부를 접고 고향으로 피난을 내려온 엄마는 바로 그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살았다고 했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은 엄마였기에 전후에 부족한 '교사 인력'을 대체할 자원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기도 했으려니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엄마라면 '가르치는 일'에서도 당신의 최고 능력치를 끌어올려 열정적으로 일 했음이 분명할 이다. 그 시절의 빛바랜 사진에서 언뜻 공단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젊디 젊은 처녀 선생님인 엄마를 보고 느꺼운 감정이 들었던 거도 엄연한 사실이니.


아무튼,  이런 엄마의 교직생활에 대한 약간의 향수와 더불어, 실습이라지만 선생님은 선생님이니 청바지 쪼가리를 입고(물론 엄마의 견해였지만) 교단에 서는 건 아니 될 일이라며 엄마는 내가 모르는 프로젝트를 준비한 듯 실습을 며칠 앞두고는 서두르는 모습이 역력했다.


" 엄마, 실습에 꼭 무슨 옷을 갖춰 입고 안 가도 된다. 내가 진짜 쌤도 아이고, 아직 학생 신분인데 있는 옷 입고 가믄 된다"


"아이다. 니는 와 그래 맨날 아무거나 입는다 카노! 니 동생은 철철이 옷 사달라고 조르는데, 니는 와 한 번도 옷 사달라 소리를 안 하노?"



실로 그랬다. 남편도 없이 엄마 혼자 벌어 삼 남매를 먹이고 공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좀처럼 옷을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는 세를 살던 동갑내기 친구의 추석빔이 부러워서 몰래 뒤 장독대로 가 울기도 했지만, 엄마가 부자인 이모로부터 얻어 온 이종사촌 언니의 옷을 내내 물려 입으면서도 그걸 부끄러워하거나 투정을 부리진 않았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대학생이 됐다고 해서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또래 친구들이 미팅에 나간다, 디스코텍을 간다.. 때마다 이유를 들어 새 옷을 사 입을 때도 난 그저 청바지 한 벌에 티 셔츠 몇 개면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는 했었다. 그런 내가 어쩌면 안타까웠음일까?


엄마는 나 몰래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실습과 옷 얘기를 연결하며 외출 채비를 하는 엄마의 얼굴에서는 마치 개선을 앞둔 장군의 기세 등등함마저 느껴졌는데, 이 모습이야말로 전에 없이 충만해 보였음도 물론이다.


"엄마 어디 가려고? 대체! 나 옷 없어도 괜찮다니까!"


"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따라 오니라, 버스 타고 세 정거장 정도만 가믄 된다."


그렇게 엄마를 따라 도착한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주택가에 자리한 단층 양옥집이었다. 이런 곳에 무슨 옷이 있겠나 의아해하는 나를 이끌고 엄마는 의기양양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지매요, 우리 딸 데리고 왔심니더, 고마 여서(여기서) 제일 비싸고 이쁜 옷 좀 보이 주이~소"



거기는 소위 백화점에 납품하는 옷을 주로 만든다는 가내공장이었는데, 겉에서 보던 건물의 모양새와는 달리 집안 곳곳에는 딱 보기에도 화려하고 멋있는 옷들로 가득했다. 엄마의 설명으로는 백화점에 걸린 메이커 옷들을 반 가격 정도에 살 수 있는데 그것도 엄마가 장사를 하면서 끈끈하게 맺어둔 '인연' 이기에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사실 어릴 적부터 세상 멋쟁이였던 아버지를 닮아 우리 삼 남매는 '입성' 즉 패션에 관심도 많았고, 옷을 허투루 입지는 않았었다. 물론 새 옷을 사 입을 형편까지는 되지 않는 관계로 그 타고난 센스를 발휘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래서일까, 그곳의 옷들이 엄마의 이야기대로 매우 고급스럽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단박에 눈치챘었다. 그래서 저으기 망설였다.


"엄마, 진짜 괜찮다니까, 내 옷 없어도 된다"


"아이다. 교생실습도 실습이지만, 니 인자(이제) 회사 취직하려면 면접도 봐야 될끼고, 두루두루 정장 두 벌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겄나! 고마 사 줄 때 입어라"


엄마는 왠지 단호했다. 교생실습이며 입사 면접이며 당신의 딸이 앞으로 거쳐가야 할 수많은 인생의 변곡점들을 생각하며 결연하게 이 날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평소와는 다른 단호함으로 옷 고르기를 채근하는 것이었다. 물론 말은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나도, 처음 보는 화려하고 멋있는 옷들에 내 눈길을 빼앗겼음을 숨기지는 않겠다. 엄마가 정해준 두 벌의 용 범위 안에서 고르고 골라 기어코 정장 두 벌을, 기다리는 엄마 앞에 내놓았다.


스카이 블루의 머메이드라인 치마와, 같은 색깔의 칼라를 매치한 엉덩이를 덮는 재킷의 셋업, 그리고 파스텔톤의 분홍빛 H라인 스커트와 허리께까지 오는 블루종 타입의 재킷 셋업.. 두 가지였다. 주인장은 얼굴도 예쁜 따님이 옷 고르는 센스도 만만치 않다는 '립서비스'와 함께 특별 할인 가격으로 해 주겠다는 말을 연신 해댔는데, 그 와중에도 3개월 월부로 옷 값을 끊어주겠다는 엄마의 말이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처럼 내게로 번져왔다. 번져와 어느새 소용돌이로 내 어깨를 하염없이 들썩이게 했다. 행여 엄마에게 들킬 새라 옷을 입어 보겠다며 다른 방으로 얼른 내뺄 수밖에 없던 나는, 엄마 앞에선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커다란 봉투에 담긴 정장 두 벌의 무게는 무거웠다. 실제로도 무거웠고, 3개월 동안 이 옷값을 갚느라 쪼들려야 할 엄마의 일상이 닿아 더 무거웠다. 그런 나의 마음을 엄마는 금세 알아차리고는 씩씩하게 기어이 한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개안타, 3개월에 끊어주믄 별로 안 부담시럽다. 카고 니가 계속 장학금 받았는데, 이런 옷 정도는 사줘야지 엄마도 말은 안 했지만 니한테 얼마나 고맙다꼬! 카이께네 교생실습 가가 멋지게 해라이"


여자 혼자 몸으로 자식 셋을 다 대학에 보낸 엄마를 두고 겉으로는 '대단하다, 멋있다' 칭송을 해도, 뒤에서는 갖가지 억측으로 쑤군거리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식 교육에 관한 한 당신만의 철학이 확고했기에 빚을 져가면서까지 삼 남매의 대학공부를 중단시키지 않았다. 거기에 대한 화답은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는 것뿐이었는데, 그걸 또 고맙다고 하니...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내 엄마는.


쇼핑백을 들고 낑낑 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 손을  엄마가 잠시 잡더니


"혜원아, 우리 여서 점심 한 그릇 묵고 갈래? 엄마가 잘 아는 집 있는데.."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너무 의외였다. 우리에게 '외식'이라는 건 그야말로 졸업식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조차 밖에서 사 먹는 것도 호사에 해당하는 우리 식구의 살림살이였기에 엄마의 이 말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에 가까웠다.


"엄마, 옷도 샀는데, 밥까지 밖에서 묵고 가면, 이번 달 생활비 우짤라고?"


"생활비는 생활비고, 니캉 이래 옷 사러 나오는기 처음인데, 이거를 기념해야지"


그렇게 나를 이끌고 간 곳은 옷을 산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에 위치한 밥집이었고, 그 집의 주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자고로 비빔밥이라 함은 먹다 남은 나물과 멸치 볶음 같은 잡다한 반찬들을 커다란 양푼이에 넣고 고추장 한 숟가락에 참기름을 휘~휘 둘러 비벼 먹는 것이 내가 아는 비빔밤인데, 그날 엄마가 데려간 곳의 비빔밥은 난생처음 마주한 '돌솥 비빔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진 식재료들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고, 달걀노른자가 황홀하게 가운데 자리한, 게다가 밥을 비비면서도 돌 솥의 뜨거운 기운에 누룽지가 익혀지는 '자글자글' 한 소리가 너무도 신기했던... 음식이었다.


엄마와 단 둘이 하는 흔치 않은 외식인 데다, 돌솥비빔밥이라는 처음 맞이하는 음식 앞에서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늘 그렇듯 음식을 정말 복스럽게 먹는 엄마의 바쁜 숟가락질에도 나는 왠지 쉬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목이 자꾸만 매어 왔다. 이런 시간을 계획하느라, 엄마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이리저리 궁리했을 것이고, 도저히 그 틈이 매워지지 않아서 또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니, 제 아무리 맛있는 돌솥비빔밥이라 해도 넘어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는 예의 평화로운 미소로 응수했다.


"혜원아, 마음 엄마도 다 안다이, 그라이 너무 걱정 말고 밥 무라. 카고 오늘 돌솥 비빔밥 묵은 거는 오빠야하고 혜연이한테는 비밀이대~이 알겠재?"


어쩌면 온 생을 통 털어 '엄마와 나' 단둘이서만 한 처음이자 마지막 외식이었을 거다. 그날의 '돌솥 비빔밤' 은. 정장 두 벌과 한 끼의 밥 속에 담긴 엄마의 사랑과 헌신을 아이가 대학 졸업하던 날 찬찬히 다시 떠올려 보았다. 가난했던 내 엄마의 무한한 희생으로 자라난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돌솥 비빔밥' 대신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뷔페를 남편 그리고 딸과 함께 졸업 만찬으로 즐기고 있는 꿈같은 현실에 대해, 많이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생실습에 입고 갈 옷 한 벌도 없었던 내가, 그 어렵다는 임용고시를 한 번만에 통과해 수도 서울의 교사로 일할 아이를 길러낸 엄마가 됐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다 내 엄마에게. 그리고, 당신의 헌신이 대를 건너 손녀에게로까지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다고 조곤조곤 말씀드리고 싶었다.


오래전 그날의 내밀하고도 다정했던 엄마의 눈빛과 말투에 실린 봄볕이 아직 눈에 선한데, 어느새 그 해의 엄마만큼 나이 든 딸이, 통창 밖으로 짙어지는 봄의 찬란함젖어 괜스레 눈물 훔치는 걸  보고 계시냐고, 자꾸만 여쭤보고 싶었다.


커버 이미지/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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