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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Oct 08. 2021

라면에 라면에 국수를 더해서

이건 뭐?

라면이란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 년에 기껏 해봐야 한, 두 번 정도 먹을까 말까 고, 갖가지 고급화된 라면 레시피 덕에 음식의 나라에서 라면의 위치가 급상승했다 해도, 미안하지만 내겐 피하고만 싶은 음식인 것이다. 일 년 열두 달을 라면만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는 사람들이나, 어쩔 수 없이 라면밖에 먹을 수 없는 분들에겐 매우 죄송한 일이지만 사정이 그렇다. 어떤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토록 우리 곁에 오래 남아 아무 잘못도 없는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게도 만드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때'부터 한잔 마시고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보다.^^ 음식에 관한 기억, 특히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에 관한 기억은 거의 아련하고, 아름답고, 감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라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렸을 무렵, 그러니까 기억으로는 아홉 살이었던 거 같다. 칼바람이 뼈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그해 겨울, 엄마는 잠시 출타를 하신 것인지 집에 계시지 않았고, 오빠는 크리스마스 준비로 교회에 갔던 하루였다.


겨울의 늦은 오후 어린 동생과, 병석에 누운 검은 얼굴의 아버지와, 하얀 낯빛에 깊은 눈망울을 지닌 말없던 내가, 앙상한 몸을 드러낸 감나무가 있던 풍경에 마지막으로 함께 자리했던 쓸쓸한 하루이기도 했다. 고요하고 적막한 공기에 어떤 어두운 기운이 서서히 몰려드는 것도 모른 채 아홉 살의 어린 나는 배가 고파 우는 동생을 위해 라면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연탄불에 끓이는 라면이 더뎠던지 동생은 자꾸만 채근을 하는 것이었다.


못 믿으시는 분도 있겠지만 당시 라면은 지금처럼 흔한 음식은 아니었다. s사에서 라면을 처음 우리나라에 선보였을 땐 서민적이기보다는 부자들이 특별한 날 먹는 음식으로 대우를 받기도 했고 다섯 개씩 뭉치로 비닐 포장된 라면이 당시 돈으로 400원 정도 는데, 그때 국민학교에 내는 육성회비가 400원이었으니, 꽤나 비싼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아무튼 엄마가 찬장에 숨겨둔 그 귀하디 귀한 라면을 끓여 한 두 젓가락 겨우 입에 넣었을 때, 아버지의 바튼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황소바람에 덜컹거리는 문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던 그 기침소리의 공포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해가 일찍 지는 12월의 오후, 문고리를 잡고 쓰러지며 대단한 기침소리와 함께 피를 토해내던 아버지..... 라면을 끓였던 양은냄비가 쏟아지는지 어쩐지 머릿속에 새하얘지면서 걸레로 아버지가 토한 피를 연신 닦아내며 소리도 나오지 않은 울음을 꺽, 꺽 속으로만 삼키고 있었다. 동생의 자지러질듯한 울음소리와 눈을 뒤집은채 경련을 하는 아버지.. 그 그림 위로 오버랩되는 불어 터진 라면발은 지울 수 없는 극한의 '공포' , 그 이상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아버지를 황망히 떠나보내고 진짜 오래도록 라면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 네 식구의 생계를 전면적으로 책임져야 했던 엄마는 라면 국물에 식은 밥을 말아먹는 식단을 일정기간 동안 선호하셨는데, 엄마가 없어도 누구든 끓일 수 있는 음식이어서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김치만 있으면 간단히 한 끼를 넘길 수 있는 음식이어서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그땐 라면이 먹기 싫다고 퍽이나 투정을 부렸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이토록 싫어했던 라면을 매주 일요일이면 집 마당에 솥을 걸어 놓고 끓이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 거의 3년을 매주마다 말이다.


우리 식구는 큰길을 하나 건너면 자리한, 도시에서는 손꼽히게 큰 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가족이었다. 당시엔. 그런 이유인지, 아니면 워낙 사람 거 둬 먹이길 좋아하는 엄마의 성정 때문인지 교회에서 제일 가까운 축에 속했던 우리 집엔 교회 오빠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손님 중에는 아주 가끔 나나 동생을 만나러 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거의 90%는 오빠와 관련된 손님들이었을 거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그야말로 말만 한 장정들이 쇠도 씹어먹을 거 같은 허기진 얼굴을 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나는 은근히 짜증 섞인 어투로 오빠들을 타박했다.


"오빠야들은 집이 없나? 와 자꾸 우리 집 양식을 축내는데? 고마, 집에 가가 밥 무라!"


"가시나! 우리 밥 안 묵는다, 라면 물끼다!"


샐쭉해진 나를 달래느라 오빠의 친구들은 가끔 과자나 주전부리할 것들을 챙겨 오기도 했지만 나는 가난한 살림에 거의 열명씩이나 되는 장정들을 매주 일요일마다 챙겨 먹이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라면을 끓이거나, 김치를 담고 수저를 놓는 일도 거의 내 몫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주일마다 라면에 말아먹을 찬밥에 김치까지 한상 걸지게 차려놓으시곤 하던 엄마도 언제부터인가 토요일만 되면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이 되는 것이었다.



"엄마, 암만캐도 오빠야들 너무 마이 먹재? 저거들 집에서 지 먹을꺼는 갖고 오라캐라!"


"아이고 야야, 우째 그카노! 우리 집 손님인데, 그칼수는 없고, 이라마는 어떻캤노?"


"우야자꼬?"


"라면만 끼리면 너무 비싸게 치이께네, 라면에다가 국시를 같이 넣어가 끼리는 기라. 그라마, 부담도 덜 되고 양도 많고, 엄마 생각이 어떻노?"


아니, 이런 신박한 아이디어가 있나, 싶었다. 당시 우리 고향은 국수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이미 자리 잡은 국수지였기에, 국수는 쉬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값도 매우 쌌다. 국수를 반 이상 넣고, 라면과 수프를 넣어 끓이면 오,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일요일의 만찬' 은 정말 대박이었다.


마당에 놓인 연탄 화덕에 커다란 양은솥을 올리고 물은 대한 넉넉히 채워 넣는다. 그리고 물이 끓을 즈음에 라면 수프와 김치 국물, 썬 김치 조금을 넣고 팔팔 끓인다. 한소끔 김이 오르면 그때 라면과 중면(소면은 너무 빨리 퍼져서) 국수를 넣고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끝! 엄마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라면에 라면을 더하고 그리고 국수를 조금 더한' 정체불명의 음식은 인기에 입소문까지 타고 손님이 점점 늘 정도였다. 워낙 김치 맛이 있는 우리 집으로 정평이 나있기도 했고, 라면과 국수가 더해져 엄청나게 불어난 양으로 만족감이 더해지니(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의 먹성을 감안해야 한다) 오히려 라면만 끓여냈을 때보다 더욱 열띤 호응이 돌아왔다.


커다란 덩치들이 마루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갓 끓인 라면도 아닌, 그렇다고 국수는 더더욱 아닌 음식을 한 그릇씩 들고는 후루룩 후루룩 잘도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엄마는 내내 흐뭇해하시곤 했었다.


"어무이예 참 맛있습니더, 어디 가도 이런 맛은 없습니더!"


"마이 무라, 찬 밥도 말아가 더 무라"



오빠 친구들이 올 때마다 그렇게 나는 엄마 곁에서 입을 삐죽 내민 채 시중을 들었고, 그 국수가 더 많이 섞인 라면을 여전히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늘~ 라면이라는 음식을 떠올릴 때면, 그 3년여의 일요일마다 축제처럼 돌아오던 떠들썩한 풍경이 눈앞에 아스라하다. 정확한 묘사가 힘든 국물의 얼큰한 냄새와 사춘기 소년들의 시큼한 땀냄새가 온 마당을 채우고, 왁자한 웃음소리에 골목이 쩌렁쩌렁 울리곤 하던 풍경 속의 후각과 시각의 묘한 배합에 콧잔등이 시큰해오기도 한다.


가난한 친구의 집에서 밥 한 끼 얻어먹자고 그 많던 오빠들이 들락날락한 것은 아니란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버지란 존재의 부재를 밀도 있게 틈틈이 채워주던 수많은 오빠들과, 그들의 뭉특한 마음씀과, 무뚝뚝하지만 다정했던 눈빛들을 말이다.


엄마 장례식장에 그들이 몰려왔었다. 오며 가며 얻어먹은, 라면에 국수가 섞여 걸쭉했던 한 그릇의 식사,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그들은 몰려와 엄마의 음식을 추억하고, 정성을 기리고 생의 모든 순간을 축복해줬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그들 몇은 목사로 교회 출신의 자부심이 되거나 , 기업체의 간부로 중후한 삶을 사는가 하면, 더러는 교수나 선생님으로, 또 예술가로 세상을 선하게 밝혀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길에 대한 긍정의 힘을 지닌듯 보여 고마웠는데,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건 어무이의 음식도 한몫을 했다며 농도 쳐가며, 지나온 날들의 바로 그 모습처럼 왁자지껄하게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줬었다.


그때 바로 깨달았다. 엄마가 늘 말씀하시던 '음식을 나누는 일' 은 , 너무나 귀한 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하는 일은 그 사람의 일생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아직도 '라면먹기' 멀리하고 있지만, 내 생의 어디쯤에서 여전히 끓고 있는 라면의 맛, 그 시절의 그윽한 경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그 사람의 허기진 마음까지 알아채고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란 걸 오래도록 기억하는 일은 더더욱.


커버이미지/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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