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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r 11. 2022

콩나물 갱시기의 신분 격상

다시없을 힐링푸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입맛은 없는데, 뭔가를 먹으면 사라졌던 입맛이 돌아올 것만 같은 날. 그럴 때 생각나는 음식은 대부분 영혼을 살찌웠던 음식, 힐링푸드라고 한다. 봄이면 유난히 입안이 꺼칠꺼칠해지고 병든 닭처럼 힘이 없어지는 내게도 역설적으로 이렇게 봄에 드는 초입이면 늘 떠오르는 힐링푸드가 하나 있다. 바로 콩나물 갱시기. 경상도를 고향으로 둔 사람이 아니라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당연히 낯선 이름에 물음표를 붙일 수밖에 없는 음식인데, 그런 이유로 이 음식의 모호하고도 유일한 정체성을 나는 참 좋아한다. '갱시기'는 '갱죽'의 방언으로 시래기 따위를 넣어 멀겋게 끓인 죽을 일컫는다. 아, 이는 물론 사전적인 정의일 뿐 '갱시기'라는 흐물거리는 이름에는 차마 언어로 다 표현해내기 힘든 '가난한 가족의 얼굴'과 '따뜻한 어느 일상' 이 공존해 있다.  



설날에 양껏 빼놓은 떡국떡이 수분을 잃은 채 말라가고, 시어진 김장김치에서 군내가 피어오르기 직전, 봄이 왔는가 하고 들뜬 맘으로 대문 밖을 내다보다가 꽃샘추위에 화들짝 놀라 옷깃을 한껏 여미게 되는 그 시간, 바로 그때가 콩나물 갱시기를 먹기에 가장 적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도식 '콩나물 갱시기' 에는 말라비틀어진 떡국떡과, 신 김치가 꼭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음식 이름 그 자체를 대변하는 콩나물은 물론이고 이제부터 얘기해야 할 울 엄마표 콩나물 갱시기에 빠져서는 안 되는 '라면'까지.. 재료 자체는 매우 소박하지만 그 맛만은 상당히 일품이어서 기억 속에 깊이 저장되는 음식이기도 하다.



누구는 다 끓여놓은 '콩나물 갱시기'를 보고 사람이 못 먹을 꿀꿀이죽 같다고도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는 우리 엄마의 놀라운 '콩나물 갱시기'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경상도 중에서도 대구와, 인근인 김천 같은 지역에서만 유독 이 콩나물 갱시기를 잘 끓여먹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특성상 충분치 못한 식재료 때문에, 있는 재료들로 음식을 궁리하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아무튼 이 콩나물 갱시기가 먹고 싶다고 아무렇게나 단박에 끓여내 올 수 있는 쉬운 음식은 아니다. 일단 '필요충분조건' 이 갖춰져야 하는데, 특히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3월의 초입에 든 어느 날, 꽃샘바람이 방 문짝을 덜컹이게 하는 저녁이어야 아주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는 김치가 꼭 있어야만 한다.


엄마는 김장독을 부시고 남은 시어 빠진 김장김치로 '김치전'을 부치거나, 흐르는 물에 설렁설렁 속을 씻어내 쌈으로 싸 먹거나, 그도 아니면 귀한 돼지고기를 단골인 시장 정육점에서 몇 점 얻어다가 김치찌개를 끓여내곤 하셨는데, 그 막바지 절정의 음식이 바로 이 '콩나물 갱시기'였다. 사실 콩나물 갱시기의 핵심은 '콩나물' 이 아니라, 맛이 출중한 김장김치에 있음이다. 아무리 실한 콩나물을 듬뿍 넣어 끓인다한들, 김장김치가 맛이 없다면 '콩나물 갱시기'의 맛은 반감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엄마의 '콩나물 갱시기'는 한 번 먹어보면 그 감칠맛을 잊기 어려운 최고의 음식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신 김치는 숭덩숭덩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놓는다. 마른 떡국 떡은 물에 불려 한 시간쯤 둔다. 식은 밥도 한 양푼 덜어 놓는다. 콩나물도 깨끗이 씻어 준비하고 대파는 어슷 썰어 놓는다. 라면 하나와 국수 조금도 준비한다. 모든 재료가 준비되면 큰 냄비에 넉넉하게 멸치와 무를 넣어 육수를 낸다. 이때 육수는 아주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좋은데, 라면과 국수를 넣기 때문에 물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마련된 육수에 식은 밥과 김치를 제일 먼저 넣고 한소끔 끓어오르면 라면과 국수, 콩나물을 함께 넣는다. 거품은 걷어내고 마지막으로 떡국떡과 대파를 넣고 중불에서 조금 더 끓인다. 취향에 따라 마늘을 넣어도 된다.

따져보면 이토록 살뜰한 음식도 잘 없을 것이다. 차려 놓으면 세상 둘도 없는 소박한 음식이지만 집에 있는 가능한 재료들로 한 끼를 훌륭하게 메워주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시절을 지혜롭게 마감하는 음식이기도 하니까. 분명히 각각의 재료들을 조금씩만 넣은 거 같은데, 그 양은 어느새 엄청나게 불어나 온 식구들을 먹이고도 남는 마법 같은 음식, 콩나물 갱시기. 이 콩나물 갱시기를 저녁으로 먹던 숱한 초봄의 날들엔, 겨우내 묵었던 잡다한 상념들이나, 추위에 얼어 있던 가난한 마음 같은 것도 송골송골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과 함께 닦아내곤 했었던 거 같다.


"마이 묵어라. 묵고 한 그릇 더 무라. 냄비에 아직 항~금 남았다 아이가"


"엄마, 엄마는 콩나물 갱시기로 동네잔치할 일 나? 내일 아침까지 무도 다 못 묵겠다"


엄마와 동생의 옥신각신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고 불러오는 배를 손으로 쓸어보며, 행복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니란 걸 상기하기도 했다. 콩나물 갱시기는 그런 음식이었다. 지친 영혼과 궁핍한 일상을 달래주고 먹고 나면 왠지 모를 그득함이 오래도록 느껴지는 음식, 바로 다시없을 힐링푸드였다.



"해장으로 콩나물 갱시기 끓였어 먹어봐"


자수성가한 남편 덕에 분당의 100평짜리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간 친구의 집들이 다음 날이었다. 아마 그때초봄무렵으로 기억된다. 반가운 마음에 전날 절제 없이 섞어마신 와인과 맥주, 소주 등속 탓 한껏 쓰라린 속을 달래주려 친구가 끓인 '해장국'이었다. 물론 라면도 빠지고 국수도 없어서 다소 밍밍한 맛이었지만, 동향 출신의 친구들이 모여 앉아 옛 기억을 서로 꺼내 보이며 웃을 수 있는 소중한 질료의 역할을 해준 콩나물 갱시기여서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럭셔리하고 어마어마한 타운 하우스에 콩나물 갱시기의 구수한 내음이 퍼지는 순간을 친구들과 함께 간직할 수 있어서 소중했다. 이질적인 것들의 신나는 조합은 때로 선명히 각인되므로.


"엄마야,~~ 여기에 콩나물 갱시기도 파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후배와 우연히 들른 고향의 한 식당에서 메뉴로 버젓이 자리한 콩나물 갱시기 여섯 글자를 발견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난한 이들의 풍족한 끼니가 돼 주던, 구황의 음식에서 이젠 특별한 음식이 돼, 찾아서 먹는다니 실로 어마어마한 신분상승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아주 가끔씩 엄마의 레시피를 따라 이 콩나물 갱시기를 끓이기도 하지만, 그 옛날처럼 봄의 초입이면 무조건 먹고 지나가는 음식은 아니기에 식당에서 만난 콩나물 갱시기가 더없이 반가웠던가 보다.



내 가난한 엄마가 자신을 닮은 결핍의 재료들로 끓인 콩나물 갱시기에는 새봄을 맞는 축원과 기원이 필시 양념으로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별 볼일 없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눈물 나게 고마운 맛을 만들어내듯 그렇게 희망의 이름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다가올 새로운 계절의 환한 빛을 남 몰래 그려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엄마의 콩나물 갱시기는 특별했었고, 유일무이했다. 엄마의 농축된 염원대로 가난하지 않게 된 오늘의 나는, 가난했던 엄마가 그리워 '콩나물 갱시기'를 끓일 준비를 하려 한다. 느리고 아주 고요하게, 해 질 녘 봄바람처럼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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