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진짜 너무 추워졌어요.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춥다는 오늘은 바로 섣달 그믐날인데요, 전, 매년 이날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답니다. 11월 들어 슬~슬 찬바람이 불어올라치면 섣달그믐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가슴이 콩닥콩닥 하고 뛰거든요. 왜냐고요?, 사실은 이야기 속에만 사는 제가 일 년에 단 하루, 생명을 얻어서 저를 보고 싶어 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날이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마음을 진정할 수가 있겠어요! 이 세상엔 저를 아는 분들이 진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지만, 저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정해져 있답니다. 전 세계 몇 십억의 인구 중에서 저, ‘성냥팔이 소녀’를 만나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런 놀라운 행복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하실 거예요. 뭐, 사실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저를 동화 속에 영원히 살게 한 안데르센 아저씨가 정해 놓은 규칙이긴 하지만요. 이제부터 한 번 들어 보실래요, 제가 섣달그믐이면 누구를 만나러 다니는지를요.
오늘은 먼~ 동쪽 끝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으로 갈 거랍니다. 제가 살던 나라에선 꽤나 먼 곳이지만, 괜찮아요. 지금의 전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새 거기가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까요. 바람보다 더 빠르게, 구름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말이에요. 섣달그믐엔 그곳도 제법 추울 때라고 하니, 외투며, 모자랑 장갑도 잘 챙겨서 나섰어요. 자, 그럼 절 잘~ 따라와 보세요. 저기 희미하지만 예쁜 불빛이 일렁이는 곳, 순한 사람들이 추운 겨울에도 서로의 체온으로 냉기를 녹여가며 살고 있다는 바로 그곳이군요. 오래전부터 이곳을 오기로 마음먹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제야 방문해달라는 편지를 받았어요. 아, 저기 한 여인의 모습이 보여요. 그녀가 저를 향해 뭔가를 자꾸 흔들고 있어요. 오~! 성냥불이로군요. 저를 불러내는 신호, 오직 저만이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불빛이죠.
“당신인가요? 저를 불러낸 사람이?”
“네. 저랍니다. 대한민국의 대표”
“아, 이상하다. 각 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언어로 동화를 번역해 저를 소개한 분들을 만나고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대한민국의 최초 번역자는 김성도 작가시라고 들었거든요. 남자분이고요”
“네. 맞아요. 그분이 안데르센의 동화들을 맨 처음 소개하셨어요 우리나라에. 그리고 전 그분의 조카랍니다.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권한을 제게 물려주셨죠”
이상도하죠? 이런 어마어마한 권한을 왜 작가님은 조카 분에게 물려주셨을까요, 그리고 이 조카는 왜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저를 불러냈을까요? 전, 찬찬히 조카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어요. 깊게 음영이 진 눈에선 호기심이 반짝거리고 있었죠. 마치 오래전부터 이날만을 기다려왔으니 어서 당신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 달라고 보채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녀는 몹시 상냥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걸어왔어요.
“성냥팔이 소녀님, 전 정말 너무너무 궁금한 게 많아요. 아마도 저의 이런 호기심을 큰아버지도 알고 계셨기에, 제가 동화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 소녀님을 만날 수 있게끔 해 주신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귀찮으시더라도 제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답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음.... 그래요, 저의 귀한 외출은 이런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사람들이 이야기를 읽고 품은 의문과 그들이 그려보는 이야기 후의 일들을 설명해주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지금 제 눈앞에 제가 그날 보았던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주변을 밝히고 있는 이 여인의 천진난만함이 조금은 성가셔도 낫겠다 싶군요.
“그래, 어떤 점이 제일 궁금했어요? 질문은 딱 세 가지만 할 수 있단 걸 명심해요”
“성냥팔이 소녀님, 왜 하필이면 섣달그믐이었나요? 왜 섣달 그믐날 성냥을 팔기 위해 집을 나섰나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왕이면 사람들이 환희에 찬 얼굴인 크리스마스라면 더 좋았겠다 싶었거든요. 새로운 한 해를 맞지 못하고, 또 아무도 소녀가 세상을 떠난 줄도 모르는 데 새해는 밝아오니까... 그런 쓸쓸함을 극대화시키고 싶었을까요, 안데르센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홀로 별이 되는 순간, 그곳엔 타다만 성냥개비만이 흩어져있고, 너무 슬퍼요.”
그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다들 제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흘릴까요? 전 사실 성냥을 하나씩 켤 때마다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 좋았거든요. 여러분도 알겠지만 그날 제 성냥은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하나씩 켤 때마다 난롯불이 지펴지고, 하얀 식탁보와 고급스러운 도자기 그릇이 놓인 식탁이 차려지더니 잘 구워진 거위도 뒤뚱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한 걸요! 만약 성냥을 켜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그 한순간의 정경들을 전 지금까지도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울지 말아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냥팔이 소녀인 저를 가엾게만 여기지만, 사실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다 별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저는 복 받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몸을 녹이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성냥을 켜지 않고, 있는 힘껏 창문을 두드리며 저를 좀 들여보내 달라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던 그 집주인에게 얘기했을 거니까요”
“성냥팔이 소녀님, 두 번째 질문입니다. 바람도 피할 수 없는 집에 살게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했고, 더군다나 자식을 굶긴 채로 거리로 내몰았으면서, 당신을 매일 같이 때렸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나요?”
“글쎄요, 참 어려운 질문이군요. 가난과 부모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어요. 설령 그것이 이 세상을 떠나게 만든 이유라고 해도요. 하지만 왜 이유도 없이 아빠의 분노를 자식인 저에게 표출했는지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용서도 할 수 없고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신께서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부모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당신의 아버지를 창조하실 때, 신은 사랑 말고 ‘악함’을 실수로 넣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마지막이 될 것을 알면서도 성냥을 켜던,그날의 제 손보다 더 떨렸어요. 그녀의 맘이 마치 촛불을 밝힌 것처럼 환하게 다가와서 어느새 제 얼굴엔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어요.
“자,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요. 마지막 질문을 할 차례입니다.”
“아, 그렇군요. 너무너무 할 얘기가 많지만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제 마지막 질문은 이거랍니다. 성냥팔이 소녀님, 당신은 동화 속에서 언제나 그렇게 소녀로 늙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어요?”
“그럼요, 만족하다마다요. 사람들은 늙고 병들고, 또 그렇게 한 세상을 마감하며 영원히 사라지지만 전, 동화 속 세상에서 별빛으로, 소녀로, 불빛으로, 이렇게 꺼지지 않고 부서지지도 않고 존재해 있으니까요. 딱 하루긴 해도, 또 매년 이렇게 다른 나라로 여행을 다닐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안타까워하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 왜 성도 선생님이 제게 이런 좋은 선물을 주고 떠나신 지 이제야 깨달았어요. 저도 어떤 날들엔 성냥불을 켜가면서 잡히지 않는 것들을 잡으려고만 했으니까요”
“잘 있어요. 대한민국의 여인이여.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동쪽 마녀의 입김이 저를 다시 서쪽으로 보내려 하네요. 제 짧은 외출은 여기서 또 접어야겠죠, 아, 가기 전에 저를 아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오늘,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대들도 삶이 외롭고 힘들 때면 그대들이 쓴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 보라고, 비록 이야기가 원하는 엔딩을 맞지 못하더라도 이야기 속에선 누구나 따듯한 성냥불을 켜서 보고 싶은 세상을 보게 될 거라고 말이죠. 내일이 오면 새로운 한 해가 또 기운차게 시작될 테니, 부디오늘보다 행복해져요.다들 굿 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