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더라
편지. 딸에게
언젠가 네가 이런 말을 했었지. 기억으로는 아마도 대입원서를 쓸 무렵이었을 거야,
“왜 기성세대들은 우리에게 꿈 갖기를 강요하는 거야? 꿈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인데. “
너의 당찼던 그 표현은 내내 엄마 마음속에 남아 있단다. 놀라울 만큼 명확한 꿈을 자기소개서에 써내야만 하는.. 그러기 위해서 정해진 꿈 틀에다가 자기 자신을 맞추고 때로는 욱여넣어야만 하는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어른으로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야.
사실 엄마도 청소년 시절에 딱히 어떤 꿈이 있었다고 얘기하진 못하겠구나. 그땐 그저 ‘시인’ 이 되고 싶었고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신문의 칼럼을 쓰는 기자가 되고 싶기도 했다. 국내 최대 여성지 기자였던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여성지 한편에 실리는 여행 기사를 쓰며 전 세계를 유랑하는 여행 작가를 꿈꾸기도 했었지. 그런데 그 씨앗처럼 수많은 꿈들 중에 어떤 하나를 골라 그것이 너의 꿈이니 너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건 정말 옳지 않은 일임을 뒤늦게야 깨달았단다.
엄마는 5년여를 거대 금융그룹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방송 글을 쓰다, 마침내 ‘방송작가’가 됐으니까 말이야. 마음에 품어왔던 많고 많은 씨앗들 중에 어쩌면 가장 뒤늦게 발현한 씨앗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젠 엄마가 쌓아온 커리어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래, 꿈은 정형화할 수 없는 아주 고귀한 무형의 그 무엇일 거야. 어떤 이는 다듬고 다듬어 완성된 꿈을 보고 갈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은 내내 꿈을 그리고 만드는 과정만 계속하다 끝끝내 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결코 그들에게 ‘꿈도 없었던 사람’ 이란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 이제와 고백하건대 엄마는 말이야, ‘그냥 되는대로 살아야지..’하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해오고 있단다. 어차피 내가 걸어가야 할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데 미리 그려 놓은 밑그림에다 인생을 맞춰갈 필요는 없다는 각성이 됐거든. 그런 의미에서 중년의 엄마에게도 ‘꿈’ 은, ‘현재 진행형’ 이거나 가끔은 ‘미래지향적’ 이기에 미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