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집에 머물다 가는 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후배와 늦가을 경주 기행을 하기로 약속하고기차에 올랐단다. 언젠가도 언급한 ‘수다 메이트’인 상경 이모의 급작스런 데이트 제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거든. 문학이나 예술 얘기만으로도 한 두서너 시간은 너끈히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때론 나눌 수 있는 관계인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몹시도 닮아 있단다.
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나,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아주 한갓진 곳에 위치한 곳들을 찾아다니고 답사하는 일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임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융단처럼 깔린 어느 외진 곳의 낙엽 길을 걸을 생각에 엄마는 기차에서부터 이미 가슴이 설렜단다. 오늘 우리가 찾은 곳은 천도교 성지 라 불리는 ‘용담정’이었지. 엄마는 사실, 이곳을 말만 들었지, 처음 가봤단다. 워낙 경주 시내로부터 떨어진 곳이기도 하고, 천도교에 입문한 사람이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선 찾기 힘든 그런 곳이었기에 말이다. ‘언니와 함께 늦가을 풍경이 제대로인 이 길을 걷고 싶었다..‘ 는 후배의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소담하고 아늑한 그곳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답답했던 가슴이 일시에 뚫릴 만큼기분 좋은 느낌을 지니고 있었구나.
경주의 숨은 단풍 명소라서 아는 사람들은 제법 찾는다는 후배의 부언이 있었지만, 평일에다 그것도 비가 곧 뿌릴 것 같은 흐린 날씨였던 오늘은 그야말로 우리만의 장소였지. 이미 나무들은 잎이 거의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었지만경건하고 고요한 숲길을 마치 안내라도 하듯 깔려 있는 낙엽들을 밟으며각자 좋아하는 시구나 문장을 읊거나 떠올려도 보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진 찍기에 잠시 열중해보기도 했단다. 그리고 수운 최제우나, 해월 최시형 그리고 손병희의 정신에 조심스럽게 접근해보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몰입하고 추구하는 인문학적인 관점에만 봐도, 이들의 사상은 여전히 매력적인 것인데오늘날엔 잊어진 이름 같아, 마음 한편이 시려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어. 돌아오는 길에 들른 진평왕릉에서는, 호위하듯 드넓게 펼쳐진 들판 쪽에 서서 왕릉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도 가져보았구나. 필경 그 옛날엔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었을 장항리 절터에 덩그마니 놓여있던 석탑과 주인을 떠나보낸 좌대는 오늘 늦가을 기행, 그 쓸쓸함의 절정이었지. 역시 늦가을 이즈음에만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쓸쓸함의 정수는 정제할 틈도 없이 그대로 뇌리에 박혀버리더구나.
그래서 엄마는 늘~ 이런 풍경 속의 또 다른 정물을 꿈꾸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고요하고 쓸쓸해서 더 아름다웠던 오늘의 마무리는 그 방점을 찍기 위해, 고흐의 그림을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