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받는 사람이 누구이건 관계없이,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라는 문구를 마지막에 덧붙이곤 한단다.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말인 동시에 나에게 거는 주문 같은 한 문장일 수 있겠다.‘행복’ 은 절대적으로 무형의 것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왠지 유형의 것으로 다가와 내 주변을 온전히 채워줄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서라고나 할까?
그렇게 매일 ‘행복’을 외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행복한 사람’ 이 돼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이런 ‘자기 완성적 예언’ 은, 돌이켜보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자책이 들 때면 더 강도가 높아지곤 했던 거 같아. 왜 엄마는 이토록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은 것일까. 오로지 행복만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일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불행한 삶’을 사는 건 인간에겐 절대 허용돼서는 안 되는 나쁜 길인 것일까? 오늘따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구나.
‘행복’ 이란 건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로만 잴 수 있는 것이기에, 절대적인 행복도 그렇다고 절대적인 불행도 있을 수 없는 모호함의 경계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니 엄마는 오히려 마흔 후반까지는‘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 데, 나만 불행하다’ 는 맘을 거의 품어보지 않은 것 같아. 그저 하루치의 삶에 충실했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기꺼이 헌신 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던 것 같구나. 더구나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한은 될 수 있으면 빨리 지워버리고 ‘선택과 집중’을 가려하는 혜안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행복’ 에 목매기 보다는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한 뼘씩이라도 깊어지는 사람, 그런 좋은 사람으로 살기 원했던 건 아닐까싶네.
쉰을 넘기면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 으로 기울어져 있던 삶의 축이, 이따금 ‘행복한 사람’ 으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 흠칫, 놀라기도 한단다. 이럴 땐 정신이 번쩍 들게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 정신의 죽비를 후려쳐줬음 좋겠구나. 그이가 혹, 너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