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나와야 비로소 숲을 볼 수 있음에
시인과 촌장의 숲
한 음절로 된 우리말, 이를테면 강, 산, 길, 별, 빛, 숲, 달 그리고 해 같은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보라. 어떤 단어가 가장 여운이 오래가는 가? 일단은 단 하나의 음절로 경계 없이 무한한 것들을 적확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우리 한글이 지닌 힘에 놀라고, 어느 하나를 집어내기가 어려울 만큼 거의 모든 단어들이 아주 길게 여운을 이끌어 마음을 풀어헤쳐지게 만든다는 데 또 한 번 더 놀라게 될 것이다.
가장 애정 하는 단어를 고른 저마다의 기준은 그야말로 백인백색일 테지만 적어도 내게 가장 아름다운 여운의 끝자락을 보여주는 단어는 '숲'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순간, 입을 벌려 '숲'이라 아주 조용하고 나직이 발음해 본다. '수우우웊' ~~ 일부러 늘려 불러본 '숲' 덕택에 이른 더위에 지칠 대로 지쳐있는 육신을 일으켜 세우는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어디선가 불어오더니, 사방이 온통 초록의 물결로 넘실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숲'이 지닌 생명의 원시성을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고단해지거나 세상의 숱한 시선과 이야기들에 신물이 날 때면, 나는 '숲'을 찾아 들어가곤 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한다면 절집이 앉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는 '숲'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수행을 해야 하는 스님들이 계시는 '절집' 은 주로 속세를 떠나 한적한 산에 자리할 수밖에 없고, 우리나라엔 지정학적으로 산이 굉장히 많은 데다 산이 있는 곳은 온통 초록의 숲이 무성하니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숲'과 '절집'을 공간적 병행으로 인식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절집을 호위하듯 숲을 이룬 나무들 사이를 거니노라면, 그러다 나무의 등에 내 등을 맞대고 서 있노라면, 시름도 근심도, 근원을 알 수 없던 불안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숲은 나의 상처를, 문드러져 있는 마음을 쓰다듬어가며 치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시작은 오래전 갑자기 맡게 된 '삼국유사' 관련 르포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라디오 방송만을 고집하며 tv 프로그램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내게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일연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획이 주어졌는데, 역사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지라 이번만큼은 거절할 명분이 딱히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연 스님이 머물렀던 고장들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그곳에 자리한 절집들을 순례하게 됐고, 기가 막히게 좋은 숲에 자리하고 있는 고요 하디 고요한 절집을 찾을 때마다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어떤 안온함을 느끼곤 했다. 그건 생명이, 푸름이, 어울림과 경건함이 주는 절대적인 안온함이었다.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음- 내 어린 날의 눈물 고인~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느껴지네
외롭고 외롭던 숲
음- 내 어린 날의 숲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음- 내 어린 날의 슬픔 고인
숲에서 나오니 숲이 느껴지네
어둡고 어둡던 숲
음- 내 젊은 날의 숲/ 시인과 촌장 '숲' 가사
깊은 숲마다 자리해 있는 절집에 앉아 마치 병풍이 둘러 쳐진 듯 장관을 이룬 푸른 나무들의 군락을 볼 때마다 원시성이 지닌 묘한 힘에 압도 당해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가기를 거듭하고 있던 즈음 이 노래를 문득, 그야말로 아주 문득 상기하게 됐다. 시인과 촌장 3집의 수록곡 '숲'이었다. 시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음률이 조화를 이룬 곡들로 구성돼 명반으로 꼽히는 해당 앨범 중에서도 가장 명곡으로 손꼽히는 곡이기에 마음속 깊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두고 있던 곡이기도 했다.
한 순간, 초록의 숲에서 누군가 달려 나와 죽비로 후려친 듯 정신이 번쩍 들더니 마치 기도문을 외우는 것처럼 가사가 입 끝에서 맴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노래의 가사는 네가 사는 곳에서 도망치듯 달려온 숲, 이 숲의 진정한 모습을 보려면 이 숲에서 당장 나가, 네가 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사실, 하덕규가 가사로 얘기하고 싶었던 '숲'은 아마도 어린 시절 겪었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오해와 번민 같은 것들일 것이다. 각각의 나무처럼 하나하나 생에 심어진 이것들이 어느새 숲을 이루게 되고 그 숲만이 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있다가 숲의 무성함에 압도당해 숨을 쉴 수 없는 순간을 맞게 되기도 하니,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숲에서 나와야 한다고 노래는 설득하고 있다.
숲에서 나와야 제대로 숲을 볼 수 있고, 숲을 이룬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마다의 모양도 제대로 보게 됨이니. -전체와 부분- 숲에서 나오니 드디어 형식적으로만 그리던 숲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역설, 노래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숲에서 빠져나와 바라다본 숲의 또렷한 얼굴을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노래가 묘사하는 '숲'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른 나무들로 이뤄진 숲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사람의 숲이거나 혹은 번뇌로 그득한 시간의 숲이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 모든 '숲'에서 얻고자 했던 위로와 평안이야말로 숲을 빠져나와 홀로 서서 바라보았을 때 더 크게 각성할 수 있다는 사실만 염두에 두면 될 것이다.
우린 특히 무성하고 빽빽한 숲에서 자주 길을 잃어버린다. 하여 삶이 버거워질 때마다 찾아드는 숲에선 잠시 평온함을 얻을 순 있어도,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숲에서 무엇인가를 새로이 도모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에서 쉬 빠져나오지 못해 허덕일 때,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우연히 시인과 촌장의 '숲'을 떠올리게 된다면 마치 방향지시등이 켜진 것처럼 고마운 일은 아닐는지...... 하여 하나의 노래가 때론 삶의 지리멸렬을 구원해 주기도 하니, 노래에 곁을 아낌없이 내줘야 하는 이유이자 노래가 존재하는 당위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