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y! 어둑시니-나가자,우울과 불안을 벗고

짧은 글, 그보다 조금 긴 생각/어둑시니에 관한 소고

by 초린혜원

타나토스는 아닌 거 같아요


최근 막을 내린 드라마 '구미호뎐'을 흥미롭게 봤다. 우리나라 설화를 기반으로 한 구성 자체도 몹시 매력적이었지만, 주인공인 구미호 외에도 이무기, 아귀, 우렁각시, 어둑시니 같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실체들을 불러내, 서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 작가의 노련함이 돋보인 드라마였던 거 같다.


이 드라마를 분석한 갖가지 기사들 중 제일 눈에 들어온 건 배우 김범이 분한 구미호 이랑을 타나토스에 비견한 기사였다. 아니, 우리나라 설화 기반인데 하필이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 그것도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라니!


이 글을 쓴 분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비유를 한 것인지 정확히 가늠할 순 없지만, 반인반수의 '이랑' 은 그 서늘한 미모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타나토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끝끝내 자신의 피붙이인 이연을 위해 목숨마저 던질 수 있었으니, 가혹하고 무자비한 성정을 지닌 '타나토스' 와는 완벽하게 다름이다.



어둑시니 이르니, 문 열어라


나는 오히려 우리가 그동안 존재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던 '어둑시니'를 주목했다. 나무 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어둑시니는 '어두운 밤에 보이는 헛것'이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고 하는데, 이 드라마에서 묘사된 '어둑시니'는 배우의 열연 덕에 '어둑시니'의 존재감을 일시에 드러내면서 보는 이들을 공포로 몰아갔다.


이 공포는 타나토스를 만났을 때 느끼는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공포라기보다, 본질 자체가 소멸해 버리고 지워져 버리는 저 깊고 깊은 원초적 어두움의 공포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어둑시니는 어디에 있다가 나타나는가? 나는 한 겨울에 접어드는 오후 다섯 시쯤의 빛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어둑시니'를 마주하곤 한다. 사물을 완벽하게 분간할 수 없는 시간, 겨울 오후 다섯 시쯤의 빛에는 어둑시니가 둥지를 틀고 숨어 있다가 푸드덕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낮은 경고음을 울리며 슬며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 이 어둑시니는, 내가 데려온 것


우리 집은 남서향으로 방향을 틀고 앉아 있기 때문에 겨울이라 해도 아주 늦은 시간까지 햇살은 폐부를 찌르려 작정한 것처럼 깊숙이 침투해 온다. 남서향으로 창을 낸 집이 처음엔 도무지 어색했었다. 특히나 여름, 이 분지의 막강한 햇살을 체에 거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버리는 이 집이 어색하고 싫었다. 애초에 빛이 주인인 집이었던 것이다.


웬만큼 어둡지 않고서야 불을 켜지 않는 나로서는 이 빛의 찬란하고도 건방진 습격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빛을 차단해야 했다. 블라인드를 1차적으로 베란다 쪽에 설치, 거실 창호엔 빛 차단 은 물론이고 방한에도 효과가 있다는 허니콤을 이중으로 설치했다.


나는 어쩐 일인지 이 빛의 축제 한가운데 거하는 집에서 호시탐탐 어둠을 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한 번의 눈 깜박임만으로도 빛의 풍성함은 갇혀버리고, 어둠을 위한 볼모로 잡혀버리기 십상이다.


이윽고 어느 날인가부터 그렇게 어둑시니는, 술래잡기의 술래 인양 '너 여기 있었네!'라고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며 내 앞에 나타나고는 하는 것이었다. 어둠에 거하는 자, 어둠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음이나, 빛의 반대쪽엔 반드시 어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과 슬픔이 함께 거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됐으니.


내가 만난, 아니 내게로 찾아온 '어둑시니'는 어두운 장막을 드리우고 어둠에 물들게 하는 존재라기보다, 빛과 점점 더 거리를 두게 만듦으로써 빛의 환함을 잊게 만들거나 끝끝내 잃어버리게 만드는 위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것들을 스스로 걷어내기 전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빛으로 이르지 못한다.



어둑시니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겨울 오후 3시쯤의 햇볕은 알맞게 구워진 카스텔라처럼 말랑말랑하다. 적당한 당도까지 지니고 있어

, 입을 크게 열고 햇살을 들이마시면 마치 달콤한 꿀물을 삼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햇볕조차도 싫어서 더 늦기 전에 블라인드를 치고, 적막하고 고요한 산사를 지키는 한 그루 나무처럼 어둠에 뿌리내릴 준비를 한다.


실눈을 뜬 채,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서 어둠으로의 시간을 탐닉한다. 어둠의 구석진 곳으로 숨어 들어가
존재했던 단 하나의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경험을 되풀이하고는 한다. 시간은 흐르고 오후 5시쯤이면 드디어 형체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거대해진 어둑시니가, 뉘었던 몸을 일으키며 남아있던 한 줌 햇살마저도 흡수해 버린다. 바야흐로 어둑시니 세상이 된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설명되었지만 어둑시니는 그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그 어떤 것으로 인한 불안을 먹고 자라난다고 한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어쩌면 매우 형이상학적인 것일 때도 있지만 그 불안을 섭취한 어둑시니는 둔갑술을 부리며 인간의 가장 취약한 곳을 파고든다.


어느 날은 형체도 없이 허물 거리다가 또 다른 어느 날에는 눈에 시퍼런 불을 켜든 도깨비처럼 그악스럽다. 그날의 마음 상태에 따라 제 모습을 바꿔가며 시비를 거는 것이다. "너, 나 과연 이길 수 있겠니?" 하고.

어둑시니 덕분에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어둑시니야 어둑시니야,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냐?


잠시 그리스 신화로 돌아갔다 오자. 타나토스는 잠의 신 '힙노스'와 쌍둥이다. 죽음에의 충동을 의미하는 신이 잠의 신과 쌍둥이라니! 어쩌면 영원한 잠은 '죽음'이라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이 담긴 것일 거다. 타나토스를 얘기할 때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신으로 자주 등장하는 신은 바로 '에로스'인데, 에로스가 삶에 대한 본능을 의미하는 신이어서 그런 것 아니겠나 싶다.


아무튼 우리의 어둑시니에게도 이렇게 타나토스의 에로스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짝꿍이 있을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추론을 해 보았지만 막상 떠오르는 존재는 그다지 없었다.


다만, 어둑시니를 물리치는 구미호의 영리한 한 마디 ' 어둑시니야 너는 잊히는 게 제일 두렵지?'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다른 존재의 두려움과 불안을 먹고 자라는 어둑시니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어둑시니를 만나도 너끈히 물리칠 수 있는 비책이 있음 아닌가.



존재감이 없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여기에도, 거기에도 있는데 마치 투명인간처럼 속속들이 타인들로부터 부정당하는 그런 경험 말이다. '왕따'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아싸'라고 불리기도 하는.


무엇이 됐든, 세상에서 격리되는 느낌, 그리고 희미해지는 체험은 여지없이 불안과 공포를 불러온다.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그 어둠의 세계, 그 세계의 지배자인 어둑시니는 우리들 그 자체가 아닐까? 잊히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이 극대화된 바로 그것이 , 빛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작정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나가자 우울과 불안을 벗고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단호한 믿음이 우리에겐 있다. 하지만 때로 어둠이 빛을 이기는 광경을 목도하기도 한다. 호시탐탐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 기회를 엿보던 어둠에게 우리가 기대려 할 때, 빛의 세계가 버거워 도망치려 하거나 벗어나고자 할 때, 어둠은 순식간에 자라나 빛의 따스함을 무너뜨려 버린다.


누가 어두움에 일용할 양식을 주었는가? 누가 어둠의 지배자 어둑시니를 무럭무럭 자라나게 했는가? 왜, 겨울 오후 다섯 시쯤의 시간에 홀로 들어앉아 고요를 빙자한 그늘에 잠들려 하는가. 나가자. 커튼과 블라인드를 걷고, 온몸에 햇살로 무장한 갑옷을 입고, 오늘이라는 場으로.




keyword
이전 04화지향성 있는 삶을 향해, 오늘도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