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취향이 굉장히 확고한 편에 속한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흔히 딜레마에 빠지는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로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택이 가끔 달라지긴 했어도,좋아하는 메뉴(짬뽕)를 고르는 데 주저함이 있거나 망설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가장 싫어하는 유형은 '아무거나'를 그야말로 고민 한 번 없이 아무 때나 외치는 사람들이다. '아무거나'라는 말의 저의에는 '나는 고민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결정하는 것도 싫으니 당신들이 대신 좀 해줘'라는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왜 본인의 취향을 이토록 쉽게 포기하고 남들에게 그 판단이나 결정을 미뤄버리는지, 나처럼 취향이 확고한 사람들은 도무지 이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확고한 취향은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랍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이렇게 취향이 무척 확고한 사람으로 살아오다 보니 언제나 따라오는 수식어가 생기게 됐는데, 그건 바로 '센 사람'이라는 일컬음이다.
머뭇머뭇하는 틈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결정을 리드하는 행위는 요즘 같은 세상에선 '멋있다'라는 칭송도 들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대리급 이상의 여성 상사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 서열이 남성 위주였던 직장에서나, 유교적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사회 관계성에선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로 부각될 때가 많았다.
한 마디로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눈에 띄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데 확고한 취향이 늘~든든한 생활의 지지대 역할을 해주었기에 타인의 불편한 시선도 그런대로 잘 견디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나의 취향을 붙잡고 씩씩하게 걸어가고 싶어도 힘들어진다. 그들의 시선은 걸림돌이 돼, 자꾸 넘어지게 만들고 주저앉게도 한다.
그래서 궁극에는 가던 길을 되돌려 아예 취향이라는 것을 없애버리는 사람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취향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렇게 주변엔 '아무거나, 혹은 이런들 저런들 어떨 이' 들이 자꾸 양산되는 현상을 불러오기도 한다.
■확고한 취향에서 지향성으로
취향이 좀 더 깊어지게 되면 -이를테면- 좋은 오크통을 만난 와인이나, 장인이 정성을 다해 빚은 소주처럼 향과 맛이 비교 불가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게 바로 '지향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둘째가라면 서러울 확고한 취향을 가진 나지만, 요즘처럼 '지향성'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취향으로 끝나 버리지 않고 이것을 더 깊어진 '지향성'으로 만들려면, 다다를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야 하고 그런 삶을 추구함으로써 부여받게 되는 '책임'에 대한 문제 또한, 따르기 때문이다.
'취향' 이야 남들과는 다른 것 정도로 인식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방향성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게 걸어가는 '지향성'은,좀 더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어서 주변에 드러내는 일도 그리 쉽지가 않다.
단순하게 무엇을 좋아하거나, 여러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취향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므로. 가끔은 지나치게 견고한 지향성을 지닌 이들이 타인들을 향해 본인들의 길만이 오직 '진리'요, '참'이라 외치는 우를 범하기도 해서 더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지향성은 더없이 소중하다.
어떤 식으로든 한 방향을 향해 본인의 자세를 어렵게 틀었고, 마음을 그쪽으로 열었다는 뜻이니까. 열린 마음한편으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은, 이미 어제의 그 바람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는 지향성을 가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한달을 내내 붙들고 있었다.이 책.
■나의 비거니즘 만화
동네서점에서 수년째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서재에서 삶 읽기'라는 타이틀도 참 예쁜 모임이다. 여기에는 '독서'라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동안 여러 차례 들고ㆍ낢은 있었지만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가며 사람과 삶, 그리고 그 삶에 미치는 책의 '핍진성', 영향력 같은 것들을 주변에 확장시키고 있는 중이다.
동일한 취향을 가진사람끼리 나누는 이야기들이 언젠가는 꽃피울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물도 주고 바람도 맞게 하고, 때로는 햇볕도 알맞게 쬐주며 그렇게 말이다.
이 얘기를 꺼내기 위해 말머리가 몹시도 길었다.
이번 분기 동안 '타자와의 연결성'을 주제로 '나의 비거니즘 만화'라는 책을 기꺼이 골랐고 다들 열심히 읽고 서로 의견들을 나누었다. 귀여운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가독성까지 좋은 이 책이 우리 독서 멤버에게 던져준 파장은 상상외로 컸다.
우리가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 '좀 쉽게 읽을 수 있겠는 걸?'이라고 단순하게 했던 판단, 그걸 단숨에 넘어서 버린 거다. 읽을수록 놀라운 반전의 책이었다.
보선 작가의 '비건이 되었다'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해, '오래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끝나는 459쪽에 달하는 책, 이 책에서 우리는 '동물권'이라는 약간은 생소한 단어를 접하고 토론을 이어나갔고, 우리가 인간으로 얼마나 이기적이고도 무모하게 살아왔나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태생이 '반쯤 비건'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먹으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입술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으며, 심할 때면 열도 끓어오르고는 했다. 워낙에 입도 짧고 성장도 더뎌서 늘~ 주변에 걱정을 끼치던 나였기에, 이런 병증은 온 집안의 고민거리였다.
병원은커녕 약도 흔하지 않던 시절, 가난한 내 어머니가 기댈 수 있었던 것은 '뭐가 좋더라'는 민간처방뿐이었는데, 언젠가는 외할머니가 어디에서 들으셨는지 참개구리 삶은 물을 장복하면 씻은 듯 낫는다며 구해오신 적도 있었다.
물론 하얀 거짓말이었지만 '이거 먹으면 이제 두드러기는 없어진다'는 어머니 말에, 어린 마음에도 지긋지긋한 가려움과 안녕을 고하고 싶어 두말 않고 먹었던 기억이 있다. 기름이 둥둥 뜬 뽀얀 국물은 곰국 같기도 했는데,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정성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그 민간요법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이후에 두드러기나 가려움은 한결 좋아지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런 체질은 쉬 변하지는 않는 것인지, 훗날 다 성장한 이후에도 육류를 섭취하게 되면 그렇게 소화가 되질 않고, 비위가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소화가 안 되니 점점 먹는 것을 멀리하게 되고, 멀리하다 보니 소비를 하지 않는 '비자발적 베저 테리언'으로 변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그때가 서른 즈음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레 우유며, 달걀도 조금씩 먹는 양이 줄어들었는 데, 이런 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의 염려는 매일 커져만 갔었다
" 아니, 그래도 사람이 힘을 쓰려면 고기를 좀 먹어줘야지!"
"5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오래 살지!"
분명 취향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한 내게는 공염불이었을 이런 말들을, 그들은 나를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시도 때도 없이 해댔지만 나의 식습관은 변하지 않았고, 어느 하루 '지식-e채널'을 통해 방영된 지구환경문제에 관한 영상을 보면서 이런 취향은 지향성으로 서서히 변모하기에 이른다.
■시작은 환경문제에 관한 지향성이었다
햄버거 패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고기-즉 소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넓디넓은 목초지를 만들어야 하고 어마어마한 산림의 훼손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열대우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영상과 함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구가 숨을 쉬지 못하면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무사할리 없지 않은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환경보전에 대한 관심은 한 프로그램으로 인해 행동의 변화를 불러왔다.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더욱 공고히 함은 물론이고, 세제를 친환경으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재활용 분리배출에 더 신경을 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해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구의 생태 시계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자각하니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커져만 갔다. 고민 중에는 '나만 애쓴다고 뭐가 바뀌겠어?'라는 자조도 조금은 들어 있었고.
이번에 읽게 된 '나의 비거니즘 만화'는 나의 지향성을 좀 더 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한탄할 시간에 더 바뀌기 위해 차분히 노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언도 해주었다. 완벽한 한 사람의 '비건' 보다 지향성을 추구하는, 서툴지만 아름다운 '비건 지향성'의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하고 또 그런 행동들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보다 유의미하게 경계가 무너진 '비거니즘'을 받아들이니,
환경문제에만 머물러 있던 내 시선은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他者-바로 동물들-로 옮겨지게 되고 그들과의 연결성을 한층 더 확장시키게도 됐다. 그동안 육류를 섭취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번이라도 동물의 권리나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인간이 생활의 편의성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자행하고 있는 일들은 차마 언급하기도 싫을 만큼 잔인한 것들이다.
이 책을 함께 읽은 한 분이 공유한 사진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원지에서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다니는 말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분은 동물권에 대한 서명운동에 동참하자며 관련 단체도 링크해 두었다. 아마 우리가 이런 책을 읽지 않았다면 무심코 지나칠 일이었지만, 이제는 이런 문제들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을 태도가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 동유럽 여행 중 빈의 '스테판 성당' 앞에서 관광객들을 태우며 달리던 마차가 생각난다.
'그래, 왠지 꺼림칙해서 안 탔는데, 안 타길 잘했군!'
■알게 되면 보이고, 보이는 세상은 이전과는 분명 달라지니.
자, 이제 문제는 깨닫고 알게 된 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겨, 지향성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함께 읽은 책친구들의 다양한 방법론이 지향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저는요 우선 육식 사진을 sns에 올리는 일부터 안 할 거고요, 아이들에게도 이 책을 보여줄 거예요
일주일에 몇 번은 채식 위주 식단을 하려고요"
"음.. 지금 당장 육식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어서, 육류를 구매할 때, 동물복지 인증마크를 확인할게요. 식구들도 설득하고요"
"동물원에 절대 가지 않을 거고요, 동물학대 근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거예요"
"옷 사는 횟수를 현격히 줄여 나가겠습니다."
그렇다. 어쩌면 '나의 비거니즘' 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그리고 그 공존 속에서 보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명의 완벽한 비건이 되기 위해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오늘도 조금씩 달라지는 '리듀스 테리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성장하고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 그것이 바로 '지향성' 이기 때문이다.
비거니즘과 생태주의의 연결성, 생태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게 되는 '페미니즘', 아직 이르러야 될 곳도많고 , 서로가 서로에게 손 내밀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사안들도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삶의 방식을 지향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 선언이 나와 내 주변의 인물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될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불편해지는 일을 나 또한 겪은 적이 있기에 말이다. 나와는 다른 객체를 존중한다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이 또한 생각으로 그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면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지향성 인간으로 살아가기
지향성을 등에 업고 우리는 성장한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일단은 발을 떼고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한 발씩 천천히 그곳을 향해 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향성의 우아함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독보적인, 저마다의 지향성 날개가 달리고 부유하는 해초 같은- 목적성이 없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나보다 성장한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흐뭇함! 보다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지향성의 길을 잃고 헤맨다 싶을 때면 다짐했던 순간 생겨났던 그 기억의 손을 꺼내, 등을 톡톡 쳐가만히 불러 세운 다음, 낮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