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사진으로 짓는 詩/디카 시 10

by 초린혜원

시간의 무덤 앞에 서서, 묘비명 찬찬히 읽어본다.


한 생을 넉넉히 살아온 이,
시멘트 벽에 누워 이제 잠시 잠을 청하노니
어느 볕 좋은 봄날, 더 푸른 얼굴로 깨어나도

반가이 알아봐 주시기를.

지금은 삼성 창조경제캠퍼스가 된, 제일모직 옛 자리 기숙사동은 정말 멋지게 나이 든 담쟁이덩굴이 휘감고 있다.


얼마나 멋진가 하면 이 광활한 캠퍼스 단지의 랜드마크가 될 정도니. 덩굴을 보며, 고요한 심연에 깃들어 니체와 장자를 떠올린다.


자연은 놀랍도록 재생과 순환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

오늘 떠난다 해도 슬퍼할 겨를이 없다.


바싹 마른 담쟁이덩굴은 벌써, 다가올 봄을 준비하며

묘비명을 써둔다. 부활할 수 있는 건 자연의 몸을 입은 시간밖에 없음이니, 인간은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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