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나의 어린 날을 찾아서
여유 없는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다. (사남매 중)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안 좋았던 기억과 좋았던 기억이 반반쯤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내 마음을 결정했다.
왜 철이 일찍 들었던 것인지... 엄마에게 돈이 드는 그 무엇을 사달라고 조른 기억이 별로 없다.
책은 좋아했지만 제대로 책을 읽을 환경이 아니었다. (그 시절 책만이라도 실컷 보았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그냥 평범한 아이로, 공부도 그 무엇도 그저 그런 아이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20대가 되었고 30대에 엄마가 되었다.
나의 정신세계가 크게 성장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는 채로.
그림책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성인들이 자신의 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빠져들게 된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책을 읽어주는 게 유일했달까.
유능한 엄마도 아니었고 똑똑한 엄마도, 경제력 있는 엄마도 아니었기에 나는 나의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를 위한 행위였다. 내가 공감하거나 빠져든 건 아니었다.
수년이 시간이 흘러 이제 아이가 책을 스스로 읽게 되었을 즈음 극심한 안구건조증에 시달렸다. 노화의 일종이라는데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나의 몸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었다.
책을 좋아했으나 안구건조증 때문에 글자만 있는 기존 책들은 도저히 읽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보게 된 게 아이들의 그림책이었다.
그림책이 꼭 아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하지만 아이가 읽을 수 있는 수준에서 시작하는 게 바로 그림책이다.
아이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그림책을 보고 느끼고 깨달을 것이다.
성인은 살아온 딱 그만큼의 깊이에서 그림책을 보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책은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이, 전해지는 메시지가 다르다.
10분이면 다 보는 그림책이라고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언어로 다 표현되지 않지만 그림으로, 여백으로, 공감각으로 전해지는 책의 그 무엇들이 때때로 어릴 적 나를 토닥여준다. 또 때때로 성인이 된 나를 지그시 바라봐 준다.
나는 그림책을 읽으며 충분히 누리지 못한 어린 시절의 나를 알아보았다.
어린 나를 내가 알아봐 주고 보듬어주고 가만가만 그림책을 보여주며 "괜찮아, 지금도 늦지 않았어."라고 말해준다.
그림책은 피곤하지 않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보이는, 느끼는 딱 거기까지만 챙기면 된다.
그래도 종종 일상의 어느 순간 그림책의 한 장면이, 어떤 캐릭터가, 놀라운 상상의 세계가 문득 떠오른다.
웃음이 지어지고 때때로 흥미진진하고 가끔 고개가 갸웃해진다.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떠랴. 그 어린 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러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린 내가 충분히 누리지 못한 동심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