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만의 구덩이를 파고, 다시 메꾸기를 반복하는거야
오랫동안 이곳에 글쓰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림책은 계속 보았지만 감상 한 줄 어디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우연히 이 그림책을 보았네요.
구.덩.이.
일본 그림책인데 일본어로는 뭐라고 할까요?(문득 궁금해집니다.)
구덩이라는 우리말 단어로 표현했는데 너무나 딱! 와닿는 단어라 그림책을 번역하시는 분들의 어휘력에 다시 한번 놀랍습니다. ('구멍'과는 정말 다르지요.)
일요일 아침, 아무 할 일이 없어서 히로는 구덩이를 파기로 했다.
그림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히로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합니다.
엄마, 아빠, 동생, 이웃 친구까지 와서 관심을 보이다가 금세 사라집니다.
히로는 열심히 구덩이를 팝니다.
파다보니 갑자기 멈출 때가 있습니다.
히로는 작은 애벌레를 발견하고 갑자기 힘이 빠졌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키를 넘어선 구덩이 속에 가만히 앉아 하늘을 봅니다.
기분이 어떨까요?
저는 이 그림책을 덮고도 한참을 멍하게 있었습니다.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필름이 돌아가듯 휙휙 지나갔습니다.
내가 판 구덩이가 생각났고 그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던 순간이 생각났고 또 어느 순간은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사후 들어갈 구덩이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를 구덩이에 묻던 그 날도 생각났구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판 구덩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 깊이가 깊든 얉든 상관없이 말이지요.
그 속에 들어앉아 나오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치로가 그랬듯, 삶이 이어진다면 반듯이 그 구덩이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구덩이를 덮을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뭐 다시 구덩이를 파는 일은 평생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니까요.
저도 많은 시간을 내가 판 구덩이 속에 들어앉아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일이지요.
그림책에서 치로의 가족과 친구가 치로가 구덩이를 파는 것을 보고 또구덩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누구도 평가하지 않은 것 처럼요.
하지만 하나의 구덩이만으로 삶을 지탱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구덩이를 여기 저기 파둔 것은 아닐까? 그것을 메꾸지않고 내 삶의 여기저기에 놓아두고 언제든 그 안에 들어가 숨으려는 건 아닐까?
그렇게 나를 돌아봅니다. 나의 구덩이를 생각합니다.
삶의 번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아프고 돈벌이는 되지 않고 아이는 커갑니다.
무엇에라도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구덩이를 파야합니다.
치로처럼 아주 열.심.해.
그게 어떤 종류의 구덩이든 상관없습니다.
열심히 파고 또 파고... 그러다 그 안에 앉아 딱! 구덩이 크기만한 하늘을 올려다 보겠습니다.
작은 하늘이지만, 그냥 '보여지는' 하늘이 아니라 내가 '만든' 하늘이니까 아주아주 멋지게 느껴질겁니다.
내 구덩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