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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다 Aug 08. 2017

진정한 ‘어른’ 가브리엘르 벵상

모든 아이가 셀레스틴느처럼 존중받을 수 있다면...

 ‘어른’의 의미는 뭘까? 사전을 찾아보니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란다. 다 자랐다는 건 다 자라지 않은 시절을 거쳤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 ‘자랐다’는 의미가 몸과 마음을 모두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누가 봐도 어른이지만 사실 마음도 어른이냐고 물으면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아이일까? 그것도 자신이 없으니 도대체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찾으면 좋을까?    


 가브리엘르 벵상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1928년에 태어난 꽤나 나이가 많은 할머니 작가다.(그녀는 2000년 세상을 달리했다) 벵상의 그림책 ‘셀레스틴느 이야기’ 시리즈를 보며 나는 ‘어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셀레스틴느(생쥐)를 돌보며 키우는 에르네스트(곰) 아저씨는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번거로움과 고됨을 감수하는 ‘어른’ 말이다. 아마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험악한 환경이었을 거다. 그래도 지금은 아이들이 ‘귀함’의 대열에서 존중받고 보호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책을 보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어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셀레스틴느의 아이 된 요구가 나에겐 짜증스러웠고 화가 났으며 때때로 참을 수 없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이를 호되게 야단치거나 어이없어하며 무시하거나 짜증을 섞어 다그치듯 설명 아닌 비난을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그림책 속 에르네스트 아저씨가 셀레스틴느에게 해 준 비 오는 날 소풍이 웬 말이며 형편이 안 되는데 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나는 그랬다. 지금도 진행형이라 슬프지만.


비 오는날의 소풍이라... 이 귀찮음을 감수하기는 정말 쉽지않을텐데...

 아이들은 그림책 속 셀레스틴느처럼 무턱대고 졸라만대는 악마가 아니라 설명하면 알아듣고 수긍하며 나름의 해결책도 내어놓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아이 키워본 부모라면, 현명한 어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어른들은 그간의 타성에 젖어, 혹은 내가 어릴 적 경험하지 못한 친절은 절대 베풀 수 없다는 각오(?) 때문에 아이들에게 아이다움을 선물하지 못한다. 문득 나는 그런 어른인 게 미안하고 창피하다.  


 가브리엘르 벵상이 바라는, 혹은 이상하는 어른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그저 내가 어른이 되기 전 바라고 원했던 그 마음을 다시 더듬어 알아봐 주는 거다. 아이는 귀찮고 힘든 존재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과거의 그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고 살피고 사랑해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존재인 것이다.


-꾸다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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