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의 인생은 그날, 비 내리는 캠퍼스에서 운명처럼 시작되었다. 대학 3학년, 그는 매년 열리는 '국토순례대행진' 행사의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시작해 경기도를 거쳐 임진강까지 이어지는 4박 5일간의 여정, 그것은 단순한 걷기가 아닌 삶의 여정을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하늘은 유난히 흐렸고, 가랑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상태는 학교 정문 앞에 세워진 작은 천막 아래서, 무심히 지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였다.
비에 젖은 캠퍼스의 풍경 사이로 한 여학생이 걸어왔다. 검은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상태의 눈에는 그녀가 유난히 빛나 보였다. 그녀는 비를 피해 천막 안으로 들어왔고, 상태는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이 바뀌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선, 그녀의 이름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 상태는 그저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비에 살짝 젖어 있었고, 대충 묶은 머리에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수수했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상태의 마음을 더욱 흔들어 놓았다.
지선은 아무 말 없이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길은 조용했고, 그 모습은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온 누군가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상태는 그녀가 팸플릿을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천막 안의 고요함 속에서, 지선이 고개를 들어 상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상태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깊은 우주를 본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이거 뭐 하는 행사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마치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첫 말처럼 상태의 귓가에 맴돌았다. 상태는 잠시 그녀의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이건 국토순례대행진이라는 행사예요." 상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서울역에서 출발해서 경기도를 돌아 임진강까지 걷는 여정입니다. 4박 5일 동안 진행되는데..." 그는 말을 이어가면서도 지선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선은 여전히 팸플릿을 넘기며 무심한 듯 보였지만, 상태는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작은 관심의 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상태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힘들겠지만 좋을 것 같네요." 지선의 말은 간단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깊었다. 상태는 그 말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녀의 관심을 완전히 사로잡고 싶은 욕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맞아요,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요." 상태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행사를 마치고 나면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도 많고, 스스로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거예요."
지선은 상태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팸플릿을 무심하게 넘기며 천막 밖을 바라봤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여, 상태는 가슴이 아려왔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참가해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상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걸 얻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지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음...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잠깐 비 피하려고 들어왔어요."
하지만 상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걷는 이유가 뭐죠?"
갑자기 던져진 지선의 질문에 상태는 깜짝 놀랐다. 그 질문은 마치 그의 영혼을 꿰뚫는 것 같았다. 순간 상태는 말문이 막혔다. '왜 걷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저... 정신건강에 좋아요. 하하..."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나온 대답에 상태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선은 상태의 어색한 대답에 말없이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차분하고 잔잔했지만, 상태의 마음속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상태는 자신이 이 여자에게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선의 차분한 태도와 조용한 미소,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깊은 슬픔이 상태의 마음을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참한' 여자였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았다. 상태는 그 비밀을 알고 싶었고, 그녀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사실, 걷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상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처음에는 힘들지 몰라도, 걷다 보면 자신만의 이유를 찾게 될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 될 겁니다."
"정말요?" 지선의 그 한마디가 상태의 가슴을 울렸다.
행사가 시작되고, 상태와 지선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그 속도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이해도 천천히, 그러나 깊이 쌓여갔다. 지선은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길을 걸었고, 그 모습은 마치 자신만의 순례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선의 걸음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모든 풍경을 그 고요한 눈동자에 담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슬픔을 한꺼번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상태는 그런 지선을 바라보며, 자신도 그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걸으니까 어때요? 좋죠?" 어느 날, 상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태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지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녀의 눈빛이 먼 곳을 향했다가, 천천히 상태에게로 돌아왔다. "음...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좋아요."
지선의 대답은 예상치 못했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는 말이 이렇게 의미 있을 줄 몰랐다. 그 말에서 그녀가 평소 얼마나 많은 생각에 휩싸여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좋다고요?" 상태는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연민이 섞여 있었다.
지선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찰나의 순간, 상태는 그녀의 눈꺼풀에 맺힌 작은 눈물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응. 평소엔 저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거든요." 지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걸으면서는 머릿속이 비워지는 것 같아요. 그냥 발걸음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게 마음을 편하게 해 줘요. 그래서 이 행사가 좋아졌어요. 이 시간 동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상태는 지선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 충동을 억누르는 대신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그렇군요. 걷는 것이 그런 의미였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지선은 상태의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조용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하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 작은 빛이 깃든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라면,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선의 그 한마디는 상태의 마음속 깊이 울려 퍼졌다.
그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상태는 지선의 내면에 자리 잡은 슬픔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미소가 조금씩 밝아지고,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가는 것을 보며 상태의 마음도 함께 치유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 상태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모든 회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선에게 다가갔다. 그의 심장은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요동쳤다.
"지선아, " 상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길을 함께 걸으면서 난 많은 걸 생각했어. 너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소중했고, 앞으로도 계속 너와 함께하고 싶어."
상태의 고백에 지선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고요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지만, 그 미소 속에는 이전과는 다른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상태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선은 천천히 상태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상태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그 손길 속에서 상태는 지선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상태의 삶은 대학 졸업 후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백수'라는 낙인이 그의 존재를 정의하는 듯했다. 끝없는 이력서와 면접, 그리고 쓰라린 거절의 연속은 그의 자존감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지선은 그의 유일한 빛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큰 그림자였다. 그녀의 따뜻함과 성공은 상태의 무력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지선 삶의 무거운 짐으로 여겼고, 그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그를 옥죄었다.
매일 아침, 지선이 일터로 향할 때마다 상태는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졌다. 시간은 그에게 형벌과도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그를 외면한 듯했고,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갔다.
밤이면 찾아오는 고요 속에서, 상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고, 미래는 불투명한 안갯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조금씩 색을 잃어갔고, 대신 절망과 무기력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그러다 마침내, 기적처럼 취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그의 승리였을까? 상태는 여전히 의문에 빠져있었다. 지선의 환한 미소를 보며, 그는 그저 겨우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갈 수 있게 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지선에 비해 한참 뒤처진 존재라고 느꼈다.
겉으로는 사회가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로 가득했다. 밤마다 그를 뒤흔드는 생각들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이것이 정말 그가 원하던 삶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그는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지선과의 결혼, 가정을 꾸리는 것... 이 모든 것이 과연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상태는 의심했다. 겉으로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이 불안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만 갔다.
상태의 일상은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 미로에서 유일한 빛이었던 지선마저도 이제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우울함이 언젠가 그녀를 떠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어 찾아왔다. 평범한 어느 날, 지선이 떠난다고 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상태는 그녀의 익숙한 미소를 보며 마지막 따스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지선의 마지막 말이 그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잘 살아."
두 단어였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끝없이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