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는 김태원을 찾기 위해 수십 번씩 전화를 걸었다. 연락이 닿지 않으면 집까지 찾아가고, 문 앞에 메모를 남기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김태원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새벽 2시, 상태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 시간에 걸려온 전화는 상태를 잠에서 깨웠지만, 오랜 시간 이 일을 해온 상태의 본능은 이내 깨어났다. 그는 피곤에 찌든 몸을 침대에서 일으키며,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어디서 전화하셨죠? 제가 새벽에야 일이 끝나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상태는 반쯤 잠든 상태였지만, 그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채무자의 목소리였다. 오랜 세월 채무자들과 대화해 온 직감이 그를 깨웠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상태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성암이 어떻게 되시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상태는 상대방이 자신과의 대화를 망설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태원입니다."
그 순간 상태는 눈이 번쩍 떠졌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그를 잡은 것이다. 여러 차례의 통화 시도와 방문에도 묵묵부답이었던 김태원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 김태원 씨. 여기 미래신용정보입니다.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으셨어요? 그리고, 집에도 몇 번이나 찾아가서 메모를 남겨놓았는데 연락도 없으시고.”
상태의 목소리는 본능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밤중에 전화를 받은 상황에서조차 그의 직업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태원의 숨소리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 숨소리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일하는 중에는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요.”
김태원의 대답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그의 말에는 피곤함과 체념이 담겨 있었다. 상태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나갔다. 그는 채무자의 사정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카드 연체되신 거 알고 계시죠? 그래서 채권추심회사로 이전되었습니다. 이제 일시불로 전액 갚으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법적 조치 들어갑니다.”
상태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사실상 협박이었지만, 이는 그가 업무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법적인 절차를 빌미로 압박하는 것이 그들의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김태원의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김태원은 말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힘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돈이 없는데요...”
상태는 그런 대답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그래, 돈이 없으니 연체를 하는 것이겠지.’ 그 생각이 상태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했다.
“김태원 씨 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빚을 갚는 겁니다. 더 이상의 변명은 의미가 없습니다.”
상태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 말에 김태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태는 그 침묵을 받아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대환대출을 받으세요. 대환대출하시면 연체도 사라지고, 매달 일부씩 갚아나가시면 됩니다.”
전화기 너머로 무거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김태원의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상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김태원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결국 김태원은 상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내일 저녁 8시까지 우리 사무실로 오세요. 준비할 서류는 제가 미리 알려드릴 테니, 빠짐없이 가져오셔야 합니다.”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상태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채무자들은 이런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상태는 자신이 이미 여러 번 겪어온 실망감을 억누르며, 그래도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저녁 8시, 김태원이 드디어 사무실에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검은 티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석호가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김태원 씨?”
김태원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석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반가운 듯 굳었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상태는 김태원의 시선을 피했다. 채무자와의 대면은 늘 불편한 순간이었다. 채무자는 채권추심 담당자를 두려워하면서도 간혹 의지하게 된다. 본인의 가장 큰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그것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태는 채무자를 그저 하나의 돈벌이로밖에 보지 않았다. 채무자가 갚는 돈의 일부는 담당자인 자신의 수당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채무자의 감정보다 돈이 중요했다.
김태원은 상태를 향해 멈칫거리며 다가왔다. 상태는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그는 김태원이 놓인 상황을 다시금 확인했다. 김태원은 이미 10개월째 연체 중이었다. 원금은 1500만 원, 그리고 이자와 연체금을 합하면 총 2000만 원이 넘는 채무가 쌓여 있었다. 상태는 일시불로 갚으면 이자뿐만 아니라 원금까지도 탕감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태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돈이 있었으면 왜 연체를 했겠어요?”
상태는 자신의 말이 어이없다는 걸 알았다. 김 태원에게 2000만 원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상태는 머릿속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제안을 꺼냈다.
“그럼, 대환대출을 하시면 됩니다. 대환대출로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시면 되는 겁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셨죠? 대환대출이 그 방법입니다.”
김태원의 목소리는 전화 통화 때와는 다르게 기대에 찬 듯했다. 그가 정말로 이 방법이 자신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석호가 끼어들었다.
“그거 하세요. 그거. 안 그러면 법적 조치 들어갑니다.”
김태원은 석호를 잠시 흘겨보았다. 그리곤 힘없이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었다. 상태는 서류를 확인한 후, 김태원에게서 도장을 받았다. 원금 2000만 원에 이자 35%, 매달 일정 금액을 납부하게 되는 원리금 균등방식이었다. 이제 김태원의 원금은 1500만 원이 아닌 2000만 원이 되었다. 이자와 연체금을 포함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 2000만 원에 다시 이자가 붙는 것이다.
상태는 대부분의 채무자가 처음에는 2달 정도는 열심히 상환을 하다가, 결국 다시 연체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대환대출로 돌리고, 원금은 점점 더 늘어난다. 끝없는 함정 속으로 빠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태는 그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이 받을 수당이었다.
상태는 서류를 모아 스테이플러로 찍고, 그것을 팀장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그런 후 김태원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제 연체하지 마세요. 그러면 또 전액 청구 들어갑니다.”
김태원은 상태를 한참이나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피로감과 체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감사의 표정도 비치고 있었다. 김태원은 인사도 없이 조용히 사무실을 떠났다. 상태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자신의 심장이 급히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요동치는 그 감각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상태도 심박수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석호가 늘 애플워치로 심박수를 측정하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 석호가 그런 시계를 의지하는 마음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석호가 말했다.
“한턱 쏴!”
상태는 멍하니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여전히 편안해 보였다. 그는 통이 넓은 바지에 엉덩이가 축 늘어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바지는 반질거렸고, 셔츠는 튀어나온 배를 감추지 못한 채 마지막 단추가 풀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상태는 갑갑함과 함께 쓴 기분이 올라왔다.
상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당 벌었으니 삼겹살이나 먹자.”
그들은 사무실을 나와 건물 입구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자, 김태원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채, 지나가는 차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담배 연기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연기가 맴도는 그 공간 속에서 김태원의 존재는 더욱 초라해 보였다.
상태는 그런 김태원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김태원의 몸짓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담배를 물고 고개를 돌린 김태원은 그들 곁을 지나가는 남학생 무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무언가를 놓친 듯한 아쉬움과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태는 마치 끌리듯 그에게 다가갔다. 김태원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 다시 시작하고 싶다...”
김태원의 말은 상태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상태는 그 말에 대꾸하고 싶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김태원을 더 가까이 바라볼 뿐이었다. 상태는 김태원이 놓인 현실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그 순간 석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가?”
석호의 부르는 소리에 상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천천히 몸을 돌려 석호에게로 향했다. 석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왜? 미안해?”
상태는 자신의 감정을 되짚어 보았다. 정말로 미안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였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미안한 건가?”
석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 감정은 필요 없잖아?”
그 말에 상태는 잠시 말없이 석호를 바라보았다. 석호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죄책감도, 채무자들에 대한 연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었다. 상태는 그 순간 지선이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말없이 웃고 있던 그녀의 미소가 다시금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