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쪼교 Aug 29. 2024

각각의 이유-2화

장편 소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은 평소와 다르게 고요했다. 시끌벅적했던 낮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지금은 적막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넓고 어수선한 사무실에는 상태와 석호, 그리고 최팀장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퇴근하지 못한 채 이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팀장은 약속이 있어 그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가끔씩 휴대폰을 확인하며,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흘낏 보며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서류를 처리할 의지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최 팀장의 모든 행동에서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읽혔다.


석호는 여느 때처럼 '할 일이 많다'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상태는 그가 진짜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석호는 종종 무거운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거나, 애플워치로 심박수를 확인하며 조심스레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은 서류를 넘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가 퇴근을 미루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상태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가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차에 불길한 일이 반복되면서부터 그는 지하철도 타기 꺼려했고, 택시 타기도 돈이 아깝다고 투덜댔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진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상태뿐이었다. 상태는 차갑고도 기계적인 동작으로 전화기를 들어 올리고, 채무자들의 번호를 눌렀다. 사무실의 적막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이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김 씨, 오늘도 연락이 안 되네요. 내일 오전 10시까지 입금 안 되면 법적 조치 들어갑니다."


그는 무덤덤하게 말을 던지고, 통화가 끝나면 다음 번호로 바로 넘어갔다. 이런 반복적인 통화는 그에게 이미 일상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지루함과 짜증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 나왔지만, 상태는 그 감정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왜 하필 이런 시간대에 전화를 걸까? 상태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낮시간에는 채무자들이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일하느라 바빴다"는 핑계가 언제나 돌아왔다. 하지만 저녁 시간대가 지나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퇴근하고, 저녁 식사 시간마저 지나면 그들은 더 이상 도망칠 구실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 시간은 그들의 방어가 허물어지는 연약한 시간이었고, 상태는 바로 그 틈을 노렸다. 피로에 찌든 채무자들에게서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통화는 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


상태는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지루한 통화가 이어졌지만 그의 마음속은 더 복잡했다. 오늘, 상태가 진짜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김 태원', 연체가 길어지다 못해 악성 채무자로 낙인찍힌 한 사람이었다. 상태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그를 설득해 왔다. 이제 대환대출로 연체를 해소하는 것이 마지막 방법이었다. 오늘은 그가 연장 서류를 작성하러 사무실로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상태는 불안했다. 그 남자가 약속을 지킬지 알 수 없었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연체를 이어온 사람이라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동안 업무를 처리하면서 알게 된 것은, 채무자와의 만남에는 언제나 약간의 긴장과 경계심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석호는 그런 상태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같이 있어줄게." 그의 목소리는 낙관적이었지만, 상태는 석호의 진심이 반은 의심스러웠다. 석호가 정말 자신을 도와주려는 건지, 아니면 단지 심심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석호가 함께 있어준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만나본 수많은 채무자들 중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 왔고, 어떤 사람은 몽둥이를 들고 왔으며, 어떤 사람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와 울면서 동정을 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 번은 채무자가 사무실에 들어와 칼을 들고 난동을 피운 적도 있었다. 그 사람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장기 연체자는 아무리 많은 채무를 탕감해 줘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석호는 갑자기 몸을 의자에서 일으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석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 말속에는 호기심과 약간의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상태는 그의 반응에 조금은 안심했다. 어쨌든 석호가 곁에 있으면, 오늘 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상태는 처음부터 석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석호의 크고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그의 목소리도 컸다.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울려 퍼지는 그의 말소리는 어떤 일상적인 대화라도 듣기만 해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석호는 특히 무슨 일에 조금만 흥분하면 그 큰 목소리를 더더욱 높였고, 상태는 그런 석호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한 번은 둘이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간 적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석호가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니, 차가 보이지 않았다. 주차된 다른 차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석호의 차만 없었다. 석호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자신의 차가 견인된 것을 알아차렸다. 석호는 화가 잔뜩 나서 식당으로 다시 들어와서는 바로 구청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아니, 왜 내 차만 가져갔냐고? 똥차라고 견인해 간 거잖아!” 석호는 전화기 너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석호의 목소리는 식당 안을 가득 메웠고, 다른 손님들은 그를 흘긋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상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석호가 큰 덩치를 자랑하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도 부끄러웠고, 석호가 혼잣말처럼 섞어 쓰는 욕설과 비속어들도 창피했다. 석호의 차가 정말로 '똥차'라 견인된 게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상태는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날 상태는 자신이 왜 석호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사무실에서 석호가 채무자들과 통화할 때마다, 상태는 늘 그의 크고 거친 목소리와 말투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석호는 항상 법의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듯 교묘하게 상대방을 위협하고 모욕했다. 그것이 석호의 업무 방식이었다. 하지만 상태에게는 그 뻔한 수법도 거슬렸다.


“돈 갚으시라고요. 예? 왜 잘 쳐드시고, 잘 쳐 입으셨으면 돈은 쳐 갚으셔야죠.”


석호가 이런 식으로 채무자들에게 말을 걸 떼면, 상태는 더 이상 그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사람이 자신과 같이 일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런 석호가 오늘 밤, 자신과 함께 남아 채무자를 기다리겠다며 퇴근을 미루고 있었다. 처음엔 의외로 느껴졌지만, 상태는 곧 석호가 집에 가지 않는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다. 석호는 상태의 차를 얻어 타고 귀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현재 석호는 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석호의 차가 주차된 지하 주차장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차 왼쪽 뒷바퀴 타이어가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 정비소에 가보니, 누군가가 고의로 타이어를 훼손한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석호는 그날부터 투덜대며 범인을 찾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뒷바퀴 타이어가 또 찢어졌다. 이번엔 분노가 극에 달한 석호는 주차장 CCTV를 확인하러 갔다. 석호는 범인을 잡는 것이 시간문제일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CCTV 영상에는 아무도 찍혀 있지 않았다. 석호는 그저 타이어가 제풀에 쭉 찢어지는 장면만을 볼 수 있었다. 그 영상을 본 석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의 달덩이 같은 살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은 마치 대보름달 같았다. 석호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석호는 이 일을 귀신의 짓이라 확신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얼마 전 자신이 담당했던 채무자가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유서에는 빚 때문에 견딜 수 없고, 독촉 전화에 시달려 더는 살기 힘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석호는 그 사건 이후로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었기에 조사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석호는 그 후로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여자가 복수하는 것 같아. 그 여자가 나를 저주한 게 틀림없어. 어떡하지? 심박수가 170까지 올랐어. 어떡하지? 이러다 나 정말 죽을지도 몰라. 어떡하지?”


석호는 무서움에 사로잡혀 한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상태는 한 달째 석호를 태우고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석호는 늘 불안해하며 자신의 심박수를 애플워치로 체크하곤 했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석호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출발하면 되겠지?”


상태는 석호의 말을 듣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불편함이 가득했다. 작은 경차에 커다란 석호가 타면 차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고, 상태는 매일같이 이 불균형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이번엔 너 때문에 내 타이어가 터질 것 같은데?”


상태는 농담처럼 말을 던졌지만, 그 속에는 조금의 진심도 섞여 있었다. 석호는 그런 상태를 보며 크게 웃어넘겼다.


“걱정 마. 아직까진 괜찮잖아?”


석호는 여유롭게 대답했지만, 상태는 속으로 타이어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 석호를 태우고 출근하는 것이 점점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퇴근도 함께하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저녁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석호가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왜 안 오냐? 피곤한데.”


석호가 애플워치에 표시된 자신의 심박수를 체크하면서 중얼거렸다. 상태는 그 말투에 짜증이 나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최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 손에 마시다 남은 냉커피 캔을 들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안 오면 들어가자.” 최 팀장은 피곤한 듯 말하며, 상태의 책상 위에 냉커피 캔을 내려놓고 사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최 팀장이 문을 열자마자, 출입문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석호는 갑자기 반갑게 일어나며 말했다.


“김태원 씨?”


사무실로 들어선 남자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검은 티셔츠와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무거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석호에게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몸에서 나는 찌든 땀 냄새가 사무실 안을 채웠다. 석호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으며 말했다.


“아, 저 아니에요. 여기 말고 저쪽이에요.” 석호는 손으로 상태를 향해 가리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