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인연이라는 게 참 기이 하기도 하다. 피하고 싶어도 꾸역꾸역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경우도 있다. 그 형과의 인연도 그랬다. 투니버스 성우시험장에서였다. 다들 조용히 대사를 연습하고 있는데 그 형만큼은 복도가 쩡쩡 울리정도로 큰소리로 연습했다.
"안녕 내 이름은 똘기 헨젤과 그레텔의 세계로 출동한 우리는 기절한 마녀할머니를 만났어."
굵은 목소리로 어울리지도 않는 열세 여아 캐릭터를 연습했다. 당연히 그 형도 떨어졌지만 그 형은 시험장에서 나오는 순간까지 " 나중에 저를 꼭 캐스팅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 형은 성우 안지환 씨 흉내를 잘 냈는데 본인의 말로는 '지환이 형'이라고 부르는 가까운 사이고 직접 지도도 받았다고 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영화홍보를 할 때 성우들이 홍보영상을 더빙했는데 그런 것들을 열심히 따라 했던 기억이 난다.
시험을 본 후에 건물 앞에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시험 잘 봤어요?"
"아뇨 떨어졌어요"
"형은요?"
"나! 나는 뭐 떨어졌는데 다음 주에 스타킹에서 성우목소리 닮은꼴로 나가. 데뷔한 거라 마찬가지지 뭐"
강호동이 진행하는 스타킹에 안지환 목소리 닮은꼴로 캐스팅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주에 녹화하러 간다고 한다. MBC, kBS, 투니버스 다 떨어졌지만 SBS에서 데뷔하게 되었으니 거기서 활동할 계획이라 한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형은 눈은 부릅뜨고 내게 말했다.
" 너도 열심히 하면 성우가 될 수 있어. 연락처 좀 줘!"
그때 연락처를 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형은 툭하면 나를 종각 앞으로 불러내었다. 밥 먹자, 술 한잔 하자. 종로 거리를 걷자. 내가 종로 3가 산타페라는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을 때도 매일 같이 찾아와 성우 목소리요 "여기요!"라고 외쳤다. 그럼 사람들이 "와 목소리 좋다, 성우인가 봐!"라고 수군댔었는데, 그 형은 그것을 즐겼던 거 같다.
가끔 그 형 차를 타고 외곽에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었는데, 그 형은 " 이건 소나타 쓰리 골드야"라고 항상' 골드'를 강조했다. 차가 없었던 나는 골드와 골드가 아닌 것의 차이를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트렁크에 붙어있던 그 골드도 문방구에서 본인이 직접 사다가 붙인 거였다.
그날 형은 성우를 그만둔다고 했다. 경쟁도 너무 세고 돈도 못 번다고 했다. 성우가 된 적이 없으니까 일이 없는 거 아니었을까. 그리고 정식 성우가 아닌 사람에게 들어오는 일자리는 싼값에 부리는 5만 원짜리 일당이었다. 그 돈도 떼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날 이후 형은 사라졌다. 연락이 안 오니 나도 굳이 연락할 필요도 못 느꼈고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그해 여름, 6개월 만에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