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나라에 가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동화 속 세상에 들어선 것처럼 신기할까? 아니면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해서 공포스럽기만 할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그날, 금요일 저녁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규호야, k형 돌아가셨단다.”
나는 막 퇴근하려는 참이었고 전화를 건 사람은 정훈이었다.
“왜?”
내게서 나온 첫 마디는 ‘왜?’였다. 왜? 그래, 왜? k형은 왜 죽었을까?
“자살하셨대.”
짧은 대답에 내 머릿속은 다시 한번 ‘왜?’라는 물음표로 가득 찼다.
k형은 왜...?
k형은 동아리 선배였다. 나이는 두 살이 많았다. 다부진 체격에 큰 키, 네모난 안경을 쓴 얼굴 너머에는 어떤 열의가 보였고, 언제나 학교에서 나눠준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다녔다. k형은 항상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 감정에 흔들려 일을 그르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웃는 얼굴을 떠올여 보게 만드는 그 얼굴...
졸업하고 3년이 지났을 때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규호야 나 19기 k형이야.”
“어!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너희 회사 로비 카페인데, 지금 내려올 수 있냐?”
나는 당황한 채 일단 전화를 끊었다. k형의 방문은 그만큼 뜬금없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존재를 떠올려 보았다. 잘 웃지 않는 k형이었지만, 그를 떠올리면 어쩐지 웃는 얼굴부터 생각났다. 잘 안 웃는 그가 어쩌다 한 번 웃음을 지을 때 입가와 눈가에 지던 옅은 주름, 어색하게 큰소리로 웃던 목소리, 자기 의견을 주장할 때 최대한 인자한 얼굴을 만들려는 듯 억지로 끌어 올리던 그의 입꼬리...
어쩌면 나는 늘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물결이 이는 그 드문 순간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취기에 지루해진 술자리에서 k형은 흔들리는 몸을 일으켜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선창하곤 했다. 그럴 때의 그는 슬퍼 보였다. 나는 그가 슬픈 사람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학교도 힘들게 다니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그가 슬퍼보였던 것은 아니다. 아주 가끔 웃는 웃음으로 자신의 슬픔의 무게를 애써 줄여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용기가 슬프면서도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회색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깎은 남자였다. 오래 전, 군대에서 휴가 나온 그가 소주 한 잔 하자며 우리를 불러냈을 때처럼 짧은 머리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 때와 달랐다. 큰소리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도, 취기 오른 벌건 얼굴로 후배에게 조언을 하려 들지도 않았다. 술 먹고 학교 앞을 어슬렁거리던 우리를 혼내던 모습과도 달랐고, 은행 인턴 시절 시장 골목을 다니며 상인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의 모습과도 달랐다. 낯선 회색 양복과 함께, 그는 전혀 다른 태도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날 k형은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있었고, 무엇을 잘못한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황금빛 명함을 두 손으로 건네던 그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심지어 혼란스러웠다.
k형은 은행 인턴생활이 끝난 후에 정직원 입사에 실패했다고 했다. 이후로 몇 년간 행정고시 공부를 했는데, 그러던 중 과 후배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가 고시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보험업계에 뛰어든 이유이다.
“공부는 이제 안 하세요?”
“응, 그렇게 됐어. 나도 처자식이 생겼으니 돈 벌어야지.”
“네...”
k형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상한 일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나라는 존재는 그가 알던 익숙한 세상에 속해 있었지만, 나와의 낯선 만남은 ‘이상한 나라’에서 겪는 ‘이상한 일’인 셈이었다.
“너는 지금 다니는 회사는 마음에 들고?”
“네...”
그 순간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거면 돼.”
시선을 피하는 나에게 k 형은 다시 말했다.
“규호야. 알았지?”
그날 k형이 내민 상품은 '적립식 펀드'였다. 나는 '적립식 펀드'가 어떤 상품인지 알았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그를 도중에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설명을 마치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도, 의미 없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는 자신이 지쳤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을까? 자존심이 상했던 것일까?
‘야! 요즘 먹고살기 힘들다. 하나만 들어주라!’라고 천연덕스럽게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나는 k형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보험상품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내가 과거의 기억을 미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이곳의 이 순간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k 형이 내민 상품 중에 내 능력에 맞는 월 적립금을 기준으로 하나를 선택했다. 당시 내 월급으로 50만 원이면 벅찬 금액이었지만 형의 기대와 권유를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사인을 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약서를 챙겼다. 바로 그 다음 순간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내게 정중히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k형은 마치 게임에 져서 벌을 받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상대가 아무리 잔인하게 나와도 자신은 참고 견뎌야 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그를 보는 것은 나에게도 끔찍한 벌칙 같았다. 나는 그의 공손한 절을 받고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언가에 성공하고 승리한 사람인 것처럼 그가 나를 대할수록 나는 묘한 모멸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 k형은 부쩍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동창회에도, 동아리모임에도, 인맥이 전혀 없는 행사 자리에도 k형은 언제나 회색 양복에 보험사 다이어리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황금빛 명함을 공손히 뿌려댔다.
이제 k형의 표정은 다양하다 못해 풍부해졌다. 무대에 선 늙은 희극배우처럼 그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나질 않았고, 굵고 큰 목소리는 적절한 음량의 부드러운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어느 자리에서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가만히 있지 못했다.
선후배들 사이에 돌던 소문으로는 k형이 보험사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영업실적으로 전국 1등이 되었다고 했다. 한 명이 보험을 들면 가족들까지 모두 보험에 들게 할 정도로 세일즈에 열정적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k형은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영업을 했고, 역대 최고 실적의 보험왕이 되었다고 했다.
내게 적립식 펀드를 팔고 간 지 1년이 지났을 때쯤 k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확실한 수익을 올리려면 50만 원으로 부족하다며 납입액을 조금 더 올리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기존의 50만 원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힘들었다.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할 때쯤이라 지출도 많을 때였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10만 원만 더 올리기로 타협을 했었다. 하지만 한 달 후에 변경된 보험 약관 내용이 날아왔을 때 보니, 납입액이 60만 원이 아니라 100만 원으로 계약되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k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전 이 금액 못 내요.”
“걱정하지 마. 나중에 몇 배로 돌려받아. 그때 가서 나한테 고맙다고나 해!”
결국 나는 한 번의 납입 후에 형에게 알리지 않고 보험을 해약했다. 30분쯤 후에 k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온갖 쌍욕을 했다. 다시는 자기를 볼 생각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나는 k형이 이상한 나라에 갇혀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정훈이가 있는 수원에 가까워지고 있다. 약속 장소에 기다리고 있던 정훈이를 태우고, 충남 서산으로 가서 상태를 태웠다. 대학 동창인 상태의 아내 선경이는 소금이 든 작은 부적을 만들어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k형이 잠들어 있는 경남 창원으로 차를 몰았다.
k형은 상태와 정훈이 그리고 다른 선후배들에게도 그렇게 보험 납입액을 멋대로 올렸다고 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 때문에 보험계약을 해지했고, k 형은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고 전화를 걸어 설득하거나 화를 냈다고 했다. 하여간 그 일로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다. 도대체 k형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낯익은 사람들 속에 k형만이 사진 속에 있었다. 그 영정사진은 십 년도 더 전에 찍은 것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서 k형은 고집스럽고 얇은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고, 그 얼굴 그대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k형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k형이 발견된 곳은 어느 외딴 시골마을의 작은 폐가였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목을 맨 채 이미 사망해 있었다. 남겨질 아내와 어린 자식 둘에게 짤막한 유서를 써둔 채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적립식 펀드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손해를 보든, 이익을 보든 꽤 많은 금액을 모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보험 해약을 안 했었더라면 k형은 오늘까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나를 비롯한 타인들의 공동 책임일까?
어쩌면 k형은 이상한 나라에서 탈출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탈출을 위한 수단이거나 혹은 위장술인지도 모른다. k형의 영정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각자가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예고 없이 회사로 나를 찾아온 그날, k형이 그랬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조금이라도 만족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거기서 나의 미래를 만들고 꿈을 키우면 되는 거라고 했다. 나는 k형의 충고를 잊고 그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 이상한 나라에서 헤매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통을 겪던 k형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늘나라 위에는 또 다른 하늘나라가 있다고 한다. 부디 k형이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와 그곳에서 많이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문득 k형의 노래를 듣고 싶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