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연구실 문을 열었습니다.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풀썩 일어납니다. 더 오래 된 먼지는 꿈쩍하지 않고 비교적 최근에 쌓인 먼지만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무방비로 벌어진 나의 입 속으로 들어온 먼지는 목구멍에 달라붙었습니다. 놀란 나는 토하듯 기침을 하고, 재채기를 했습니다.
컥컥!
전등을 켰습니다. 불빛에 놀란 먼지는 숨기에 바빠 보입니다. 창백한 빛이 먼지와 어둠의 커튼을 찢어내자,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짐승들처럼 연구실의 장비와 책상들이 형태를 드러냈습니다. 그 빛이 나는 불쾌했습니다. 마치 내가 이곳의 불청객인 것처럼.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습니다. 바짝 마른 태양 빛이 안으로 파고들어와(내가 있는 쪽으로 빛이 오는 거니까, 파고들어가가 아니라 파고들어와가 맞습니다) 눅눅한 어둠을 말립니다. 그 빛이 어둠과 먼지를 이기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어둠은 전등 아래 그림자를 만들어 끄떡없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나는 다시 전등을 껐습니다. 그러자 태양빛은 연구실 더 깊숙이 파고 들어와 어둠을 샅샅이 지웁니다. 먼지도 모두 없애버리려 하지만, 그건 어림없습니다. 먼지는 어느새 다시 살아나 태양빛을 등지고 공기 사이로 유유히 날아다녔습니다.
먼지를 좇던 나의 눈에 뭔가가 보였습니다. 벽에, 아니 벽에 걸린 거울 안에 뭔가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나였습니다. 오래된 나.
그때 나는 알았습니다. 함정이라는 것을. 내가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이제는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회사는 나에게 모든 조건을 약속했습니다. 넓은 연구실, 차고 넘치는 장비, 넘치는 자료, 넘치는 인력, 넘치는 연봉, 넘치는 복지를... 그 대신 그들이 원한 건 내 학위와 경력이었습니다. 연구소 설립을 위해서는 경력 2년 이상의 석사 출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동종업계 2년 이상의 경력자를 채용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학위를 갖춘 경력자는 기업에 전문성을 확보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인세 감면과 인건비 지원 등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조건을 만족할 만한 인력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 제의가 내게 들어왔을 때, 조건만 맞다면 도전해 볼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아마도 나는 삶이 무료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료함의 덫에 빠진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도전할 가치가 있습니다. 낯선 환경이 그리울 때쯤 나는 이직을 결심했죠.
그곳에 처음 갔을 때의 공기가 생각났습니다. 낯선 공기는 숨 쉴 때마다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색깔은 혼탁한 회색이었고, 냄새는 시큼했고 역겨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잡을 듯했고, 침묵 속에 눈빛만이 번쩍였습니다.
회사가 내게 기대한 건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이 필요했던 것뿐이었습니다. 간판으로 내 걸 얼굴, 서류 안에서만 살아있는 연구논문, 존재하는데 실재하지는 않는 그런 얼굴이 나라는 존재였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입간판이 되었습니다. 언제든 접어 창고에 처박아 놓았다가 필요하면 다시 꺼낼 수 있는.
대표의 혼탁한 눈은 오만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곳의 태양과 하늘은 거짓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속았던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추억은 텅 빈 지갑 속에 구겨진 명함만이 가득 찰 뿐이었습니다. 현실은 거짓으로 포장되었고, 거짓은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도 얼마간은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속이려고도 해보았습니다. 내가 다른 모든 것보다 귀중히 여기는 그 무엇이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명예도 아니고 부귀도 아니다, 어떤 순간이 내 삶에 희귀하고 귀중한 것이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하려 했죠.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그 어떤 것도 상관없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모두 사라져 버릴 거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사려져 버린 수백 가지 거짓 사건 중에 그래도 분명히 남아있는 사건은 한두 가지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건들 중 나는 아주 가끔 조심스레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잘린 다리에 통증을 느끼듯, 실재하지 않는 아픔이 마치 검은 물 속에서 떠오르는 물건처럼 표면에 드러납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건져냅니다. 그 당시의 배경, 말투, 움직임이 살아납니다. 그 순간 나는 멈춥니다. 생생한 기억이 나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영상들이 그것들에 지워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내 멈추고 빨리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늦었습니다. 이미 응고해 버린 흔적이 남아버렸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내 키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는 거울이 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연구실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변합니다. 나는 거울을 보는 것이 좋아했습니다. 고독이 짓누르는 거울밖 세상과 달리, 거울 안은 평온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거울 속에서는 흩날리는 먼지도 보이지 않았고, 실험 장비들도 분주해 보였습니다. 태양 빛은 밝다 못해 찬란해 보였죠.
나도 왠지 거울 속에서는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나는 거울 앞에 의자를 두고 그 위에 앉습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웁니다. 증오심에 가득 찬 붉은 얼굴이 고개 숙인 현미경이 보이는 배경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거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홀로 있는 내가 거울을 보았을 때 배경은 흐릿해지고 내 얼굴만이 보이더군요. 얼굴을 구겨보며 여러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거울 속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내 얼굴이 어떤지 나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못나지 않았다고 하니 나는 잘난 줄 알았습니다.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못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내가 만족하면 되는 것입니다.
햇빛 속에 비추는 내 얼굴을 볼 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있습니다. 붉게 물든 얼굴과 어두워진 눈밑 사이에서도 검은 점 두 개가 다이아몬드와 같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태양 빛을 받은 두 점은 붉고 아름다운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이 붉은빛이어서 좋았습니다. 내 이마로 떨어지는 머리칼은 노란빛을 띠더니 황금색으로 다시 반짝입니다. 만일 그것만이라도 없었다면 내 얼굴은 애매한 것이 되어 쓸모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흑백의 거울 속에서 나만이 색을 가지고 있어 좋았습니다.
거울 속의 나를 볼 때 거기엔 확실히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표정은 없습니다. 어쩌면 내가 내 얼굴에 너무 익숙해져서일지도 모릅니다.
오래 전에 어느 선생님이 그랬습니다.
“거울을 너무 오래 보면 거울 속의 네가 도망가.”
거울을 너무 오래 보았나 봅니다. 낯선 이가 나를 보고 있습니다. 거울 속의 나는 다른 눈, 코, 입을 가진 이가 되어 나를 쳐다보는 거 같습니다. 나는 거울 속의 내가 두려워 거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마를 대고 노려봅니다. 그러면 거울 속의 눈, 코, 입이 모여들어 하나의 점이 되어버립니다. 얼굴을 찡그리면 거울 속의 그도 따라 합니다. 그렇게 나는 거울 속의 누군가는 지워져 버리고 나를 다시 찾아옵니다.
오늘같이 하루가 없는 날이면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히고, 일에서도 버림받으면 내가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빰을 세게 때리고 볼을 꼬집고 나면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집니다. 그러면 나는 온기를 느낍니다.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거울 속의 나도 행복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문밖의 사람들이 짓궃게 연구실 문을 쿵쿵 두드립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릅니다.
"두껍아 두껍아 뭐 하니? 밥 먹니?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익숙한 소음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나는 거울의 함정에 빠질 뻔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울을 피합니다. 나는 거울을 외면하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창가로 갔습니다.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일터, 감옥, 일터, 감옥, 일터, 감옥...
갑자기 일어나는 하품에 눈물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