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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책방 May 06. 2024

등산의 이유

짧은 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에게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가는 길엔 끝이 있었으면 했다. 나는 어느 바위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빗방울이 내 모자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배낭을 한쪽 나무옆에 던져놓고 벌러덩 누웠다. 방수코팅된 옷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들고 싶었다. 여기서 살든 죽든 상관없었다. 자유롭고 행복했다.




 일주일 전 나는 어느 철학관에서 사주를 보았다. 일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노인은 나를 보고 말했다.


-이름? 생년월일?


노인은 내 이름 멋들어지게 한자로 쓰더니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 구렁텅이에 빠져있군.  조금만 더 참아 이제 다 왔어. 앞으로 2년이 되는 해에 생일이 지나면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동안 산에 다녀. 마음에 위로가 될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럼, 이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드디어 끝나가는 건가?


나는 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등산은 20년 전에 학교친구들과 가본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거 같았다. 나는 그 길로 어느 아웃도어 매장에 들어가 신발과 모자, 배낭, 옷을 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가까운 산을 검색했다. 감악산이 검색되었다. 등산코스는 출렁다리-범륜사-악귀봉-장군봉-감악산비정상까지 갔다 오는 왕복 4시간의 코스였다. 나는 다음날 새벽 6시에 집에서 차를 몰고 출발했다.  차에 타니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여행을 떠나는 거다. 알 수 없는 숲의 세계로, 마법 같은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새로운 시간+환경으로 들어가는 거다라고 말이다.

 

산아래 주차장에 도착해서 멀리 보이는 감악산정상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회색 두뇌 같은 구름이 산 정상둘레에 둥둥 떠있었다. 나는 감정 없이 혼자 떠들었다.


-나는 저곳에 갈 거야.

-나는 산 정상에서 내려다볼 거야

-나에게는 어떤 의무가 있어.

-나는 올라갈 거야


입구를 지나 조금 걸으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도시 경계선 너머로 온 거 같았다. 새로 산 등산화가 익숙지 않은지 벌써부터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첨벙거리며 비를 뚫고 걸으니 출렁다리가 보였다. 미끌거리는 출렁다리를 밟으니 다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다리에서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질것만 같았다. 이래서는 산 정상까지 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시선을 다리끝에 고정시키고 앞만 보고 걸었다. 이 다리만 건너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다리만 건넌다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다리를 어떻게 건넜는지 내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다리를 건너 반대편에 와 있었다. 출렁다리를 건너니 등산코스 안내표지판이 보였다. 이제부터가 등산코스의 시작이다. 가파른 산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다시 저 출렁다리를 건너 되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느니 위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길이 있었는데 나는 운계폭포를 지나 범륜사에서 임꺽정봉방향으로 올라가서 정상에 도착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범륜사 가는 길은 생각보다 초보등산객인 나에게는 험난했다. 거금을 주고 산 등산 스틱이 생각났다. 배낭에서 스틱을 꺼내 네발 달린 짐승처럼 기어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너무나도 외로웠다. 비가 와서인지 등산객을 이제까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숨을 헥헥거리면서 더 이상 못 올라갈 거라 생각했을 때쯤 범륜사가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비빔밥, 어묵, 커피를 파는 곳이 있었고, 언제 올라왔는지 꽤 많은 등산객들이 어묵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커피 한잔을 들고 비를 피해 한쪽 구석으로 갔다. 누군가 말을 걸었다.

말을 건 남자는 키가 크고 팔다리가 가늘었으며 검정색 우비를 입고 있었다. 만약 등산중에 만났다면 곰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남자는 말했다.


- 비 오는 날 산에 오는 매력이 이거죠


나는 '그러네요' 라며 같이 웃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비가 내리는 산은 낭만이 있고, 분위기가 있고, 빗소리가 있고, 운치도 있었다.


잠시 쉬었던 사람들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뒤따라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것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 몰랐다. 올라가다 보니 화살표 표지판이 임꺽정봉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선택한 방향은 돌도 많고 길이 많이 험한 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과 같았다. 우리가 가는 길은 내가 선택하지만 운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불안한 마음으로  '이 길이 맞나?'라는 생각으로 올라가니 '감악산비'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하지만 올라오는 동안 나는 미아가 된 거 같았다. 앞서 가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길로 갔지만 나만이 고집스럽게 이길로 올라온 것이었다. 다시 혼자가 된기분에 불안해졌고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나는 바위 위에 누워 반 포기 상태로 비를 맞았다. 눈을 감고 잠이 들기를 원했다. 온몸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이 시원했다.  그때 철학관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조금만 버텨, 이제 다 왔어!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조금만 버티면 돼'라고 말이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산을 올라갔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머리가 덜걱거렸다. 임꺽정봉에 도착했을 때 회색구름사이로 파주시내가 보였다. 아니 세상이 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미천하고 우스워보였다. 내가 살던 세상은 저런 곳이었다.




익숙지 않은 등산화로 젖은 돌을 밟자 붕하고 몸이 떴다. 떨어지면서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는데, 아픔에 한참에 무릎을 손으로 감싸 앉았다. 등산 스틱을 의지해 간신히 일어났다.

다리를 바꿀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렸다. 나는 심하게 다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아픔도 익숙해졌고, 계속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픔이 익숙해져서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 왔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 올라왔다. 어느새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는 피맛이 올라왔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올라가니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산정상이었다. 그곳에는 감악산비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저것을 보려고 이렇게 힘들게 올라왔나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기뻐했다. 그리고 정상 정복의 기쁨을 나누며 서로 사진을 찍고 기억 속에 남겼다. 나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한 인간의 삶을 향한 지극한 연민과 미련을 품에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서 죽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무엇이 현실이고 상상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것이 철학관 노인이 말씀하신 이유라고 말이다.


나는 하산하기전 편의점에서 샀던 삼각김밥을 먹었다. 아까 범륜사에서 만났던 곰같은 사내가 커피 한잔을  건네며 활짝 웃었다. 나도 활짝 웃어보였다. 커피안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쓴 커피를 묽게 희석시켰다. 

나는 앞으로 2년 동안, 마지막 생일이 오는 날까지 전국의 산을 다닐 생각이다. 그리고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 나갈 것이다.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듯, 인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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