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4일차 데우랄리 ~ ABC(4,130m)
(하산) 6일차 시누와 ~ 포카라(850m)
ABC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대망의 트레킹 4일차, 오늘은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에 도착하는 날이다. ABC 트레킹 코스를 걷는 전 세계 수많은 트레커들이 다양한 루트와 여러 마을을 거쳐 각자의 길을 걷지만, 결국 ABC에서 다 만난다.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디펜드라는 나와 한별이에게 "ABC에서 바라보는 장관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어떤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기대됐다. 돌아온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귀국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히말라야 썰'을 풀면서 똑같이 말하고 있더라. "거기 풍경은... 진짜 평생 못 잊어."
동이 틀 때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발했다. 데우랄리를 막 벗어난 초반부는 전날 걷던 계곡의 느낌과 비슷했다. 좌우가 높은 산으로 막혀 있었다. 하지만 데우랄리로 걸어오던 어제와 공기의 느낌은 달랐다. 비슷한 속도로 걷는데도 숨이 금방 가빠졌다. '정말 산소가 부족한 높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숨을 고르며 느릿느릿 걸어갔다. 데우랄리에서 ABC까지 가는 중간에는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가 있다. 트레킹 내내 북쪽으로 걸어왔는데 MBC를 기점으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는다. 지도에서 보았을 때는 서쪽으로 꺾은 길로 정말 조금만 가면 ABC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ABC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부족한 공기로 인해 걸음이 너무 느려졌고, 저 멀리 보이는 ABC의 건물들은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새하얀 눈으로 덮힌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봉우리
그래도 MBC를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고나서부터는 풍경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숨이 찼지만 힘들지 않았다. 풀이 거의 자라지 않는 낮은 들판과 탁 트인 하늘 그리고 등 뒤로는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당당하게 서있었고, 앞으로는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보일 듯 말 듯 앞 들판의 낮은 풀과 바위 사이로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트레킹 코스에 눈이 쌓이진 않았지만, 솟아있는 마차푸차레 봉우리와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은 모두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해가 더 뜨면 구름이 가득 끼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빨리 ABC에 도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페이스를 올리면 바로 숨이 찼다. 마을 회관에서 놀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집으로 돌아오는 할머니의 걸음걸이처럼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천천히 걸었다. 저 멀리 ABC의 롯지들이 점점 더 크게 보였다. 유튜브에서 수없이 보던, 정유정 작가가 쓴 히말라야 환상방황에서 읽었던, 매일 밤 누워서 상상했던 바로 그 ABC가 내 눈 앞에 보였다. 그렇게 2시간을 넘게 걸어가서 겨우 도착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걸어올 때 맑았던 하늘은 우리가 ABC 도착하기 전에 어느새 구름으로 뒤덮여버렸고, 멀리서 빼꼼히 볼 수 있었던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은 회색의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베이스캠프에 빨리 도착해서 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멀리나 짧게 봤던 새하얀 장벽 같은 만년설들에 만족하고 우리는 짐을 풀었다. 아쉬워하는 표정을 실컷 짓고 있었더니, 디펜드라가 옆에 와서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 충분히 긴 시간이 있기 때문에, 구름이 걷힌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위로해줬다.
고생 많았다 한별아. 이제 꽃길만 걷자
오늘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수없이 걷던 2일차의 오전, 오후보다 체력적으로 훨씬 힘들었다. 해발 4,000m 언저리는 정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평지를 걷는 것보다 3배 정도 힘든 기분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다행히 별다른 고산병 증세는 발생하지 않아 짐을 풀고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주방으로 갔다. 우리는 그 롯지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여유롭게 점심 먹고 충분히 쉴 수 있었다. 이 곳 ABC에서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일정을 짜준 디펜드라에게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이 곳에서 내일 아침 일출을 본 다음, 밥을 먹고 빠르게 하산할 예정이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도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구름에 뒤덮여있었다. 하지만 언제 또 순식간에 구름이 걷힐지 모르기에, 카메라를 챙기고 산책에 나섰다. 롯지 뒤편에는 박영석 대장 추모비 등 한국 산악인들의 흔적이 많고 또 해발 4,000m가 넘는 지역에 빨리 적응을 하기 위해서도 산책을 하는 게 좋다고 한다.
힘든 오르막길은 다 끝났다. 이제 ABC의 자연을 온몸으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