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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빗헌터 Sep 15. 2020

드디어, 온전한 안나푸르나를 감상하다

트레킹 4일차 데우랄리 ~ ABC(4,130m)

오목은 졌지만 원카드는 이기고 싶어


안개 같은 구름은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점심을 주문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넷은 원카드 게임을 했다. 어제 데우랄리에서 디펜드라에게 오목 참패를 당했던 게 생각이 났다. 오목 규칙을 알려준지 하루 만에 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최선을 다했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디펜드라가 사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게임이었는데 우리한테 모르는 척한 것이라 위로하면서, 이번 원카드만큼은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부족한 산소로 하품이 뻑뻑 났지만, 여유롭게 한별이가 1등을 했고, 내가 가까스로 2등을 했다. 한국 사람으로서 자존심은 지켰다.


무릇 달밧을 먹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낮은 고도의 롯지에서는 고기 요리를 주문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지나면 더 이상 고기를 팔지 않는다.  네팔인들에게 '산'이 주는 성스러운 의미도 있고 보관이나 운반의 이슈도 있었던 것 같다. 고기는 내려가서 실컷 먹으면 되니까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달밧을 시켰다. 부산에 놀러 가면 밀면과 냉채족발을 먹고 다음날 아침에는 돼지국밥으로 마땅히 해장을 해야 하듯, 네팔 트레킹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무릇 달밧을 먹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1인 1달밧을 시키고 우리는 감자전과 마늘 수프를 추가로 주문했다. 마늘 수프는 고산병에도 좋다고 하여, 거의 매일 한 번쯤은 먹었던 것 같다. 무심하게 다져놓은 마늘이 씹히는 수프는 달밧과 함께 우리 트레킹의 소울푸드였다.  


두둑하게 배를 채우고 우리는 ABC를 크게 한 바퀴 산책하기로 했다. ABC는 안나푸르나 정상을 등정하기 위한 전문 산악인들의 '출발지'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분들에게는 출발지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종 목적지였던 것이다. 이 ABC에는 여러 개의 롯지가 있고 드문드문 텐트로 보였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천천히 걷다 보니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이 안나푸르나에 오르다가 생을 마감하신 전문 산악인들의 추모비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분들도 목숨을 내놓을 만큼 위험한 등정이라는 것을 아셨겠지만, 정상에 태극기를 꽂아 대한민국을 빛내기 위해, 산악인으로서 개인의 목표를 위해 보여준 당신들의 용감함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나푸르나에 잠든 산악인들을 기리는 추모비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온 몸으로 느꼈을 당신들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행동은 행위자의 의도나 감정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최근에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안 써서 지적을 받은 남성이 화를 못 참고 다른 승객에게 슬리퍼를 휘두르고 우산을 집어던진 사건이 있었다. 그런 행동의 배경에는 행위자의 불쾌한 감정과 상한 자존심이 있었을 것이다. 더 큰 협박이든 회유를 통해 의도를 잠재운다면, 사회에서는 그런 행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마동석 같은 보안요원이 달려왔다면 그 남자는 더 이상 슬리퍼를 휘두르지 않았을 것이고, 좋은 말로 설득을 통해 그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욱한 구름 속에 외로이 서있는 추모비


하지만, 자연의 행동은 의도도 감정도 없다.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안나푸르나 어느 한 계곡에 연쇄살인범이 서있든, 세상을 구한 현인이 서있든, 눈사태는 그들의 도덕성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유명을 달리하신 전문 산악인 분들은 자연의 위력 앞에서 더욱더 죽음의 공포를 많이 느끼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눈사태와 눈바람을 멈춰달라고 아무리 협박하고 설득해도, 자연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마땅히 자연스러운 현상을 보여줬을 것이다. 인간이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온몸으로 느끼셨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쉽게 추모비를 떠날 수 없었다. 한별이는 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추모비 앞에 서있던 것 같다. 각자 롯지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안개 자욱한 추모비의 감상을 곱씹었다.


ABC의 한 모퉁이에 앉아서 쉼 없이 밀려드는 구름을 감상하고 있다


ABC의 북쪽으로는 아주 깊은 빙하가 있다. 얼핏 보면 그냥 돌로 가득 찬 계곡 같지만, 빙하 위에서 바위가 으깨져 모래가 되고, 바람에 흐르면서 마치 돌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공간으로 바위와 빙하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한없이 고요한 자연 속에서 빙하가 만들어내는 천둥 같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발 4,130m,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정도로 자욱한 흰 연기, 고요한 산속에서 바위가 절벽으로 떨어지고 빙하가 으깨지는 소리까지 그 어떤 것도 내게 익숙하지 않았다. 가만히 풍경을 감상하여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내가 정말 신들의 세계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 백 미터 아래에 펼쳐진 빙하


드디어, 온전한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을 감상하다


추모비와 빙하를 실컷 구경하고 롯지에 들어가려는 찰나에 갑자기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ABC에 도착해서는 가득 낀 구름 때문에 제대로 안나푸르나 봉우리들과 맞은편 마차푸차레 봉우리를 감상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다시 롯지로 들어가기 전에 구름은 썰물처럼 동쪽 해발고도가 낮은 쪽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는 롯지 뒤편 작은 언덕으로 걸어갔고, 새하얀 병풍 같은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수 천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땀과 비로 샤워를 하면서 4일 동안 걸어 올라와서,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안나푸르나의 풍경은 그 어떤 카메라로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병풍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모르는 한자들을 한 자 한 자 뜯어보듯이, 안나푸르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능선이 어떻게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어떤 봉우리에서 가파르게, 혹은 완만하게 다음 봉우리까지 이어져있는지 아주 세세하게, 오랫동안 뜯어보았다. 오른쪽 끝까지 다 감상하고 나서는 다시 왼쪽 봉우리까지 자세히 뜯어보았고, 안나푸르나가 눈에 익을 때쯤은 뒤를 돌아 마차푸차레 봉우리를 또 뜯어보았다. 구름을 보려면, 항상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했었는데 이 곳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높은 봉우리들은 감히 구름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듯, 구름은 다 허리춤에 차고, 봉우리는 구름 한 점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하늘로 우뚝 솟아있었다.



행복했다기보다는 황홀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나와 한별이는 새하얀 모습을 드러난 안나푸르나를 원 없이 눈에 담았다. 롯지로 돌아와서는 서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자랑하기 바빴다. 저녁을 먹고 조금 더 쉬다가 나는 별을 보러 나갈 예정이었다. 어두워지고 나서 저 산의 풍경은 어떨지, 다음날 일출 때 바라보는 모습은 또 어떨지 계속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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